◇ 박상학씨.

북한 지역에 전단지(삐라)를 살포하는 일로 요즘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탈북자 朴相學(박상학)씨가 울었다. 2008년 12월 6일 한나라당 朴熺太(박희태)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다. 그날 그가 흘린 눈물은 기쁨의 눈물도, 서러움의 눈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날 그 상황에서 그가 흘린 눈물은 그의 답답한 심정을 외부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박씨는 盧武鉉(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부터 北(북)에 삐라를 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삐라를 풍선에 담아 보내기 때문에 ‘풍선사업’이라고도 한다.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들에게!’로 시작되는 이 삐라에는 6·25 전쟁이 북한의 南侵(남침)에서 비롯됐다는 ‘6·25 전쟁의 진실’, 南(남)과 북의 현실을 비교한 ‘북조선이 망한 리유’, 金正日(김정일) 家系(가계)의 부도덕성을 폭로한 ‘김정일 출생의 비밀’ 등이 ‘조선(북한) 인민해방전선’이라는 단체 이름으로 실려 있다.

삐라에 실린 예민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박씨 등이 벌이는 ‘풍선사업’은 지난 수 년간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게 진행돼 왔다. ‘풍선사업’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며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북한이 북한민주화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대표 崔成龍·최성룡)이 보내는 삐라를 핑계로 남한 사회에 위협에 가까운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매국단체’

북한은 2008년 10월 2일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삐라 살포가 계속될 경우 개성공단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북한의 ‘위협’에 가장 먼저 화답(?)한 곳은 대한민국 정부의 통일부다. 통일부는 같은 달 8일 북한에 삐라를 살포하고 있는 對北(대북) 단체에 “대북 삐라 살포 자제”를 요청했다.

북한의 위협과 통일부의 자제 요청이 이어지며 ‘대북 삐라 살포’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삐라 살포를 주도하고 있는 북한인권단체에는 보수진영으로부터 들어오는 후원금이 급증했고 격려전화도 쏟아졌다. 통일부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북한인권단체의 북한 지역 삐라 살포는 계속됐다. 10월 10일에는 북한 인권운동가인 미국의 디펜스포럼 수잔 숄티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西海(서해) 무의도 앞바다에서 삐라를 풍선에 실어 북한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삐라 살포 자제를 요청하는 정부의 대응 수위도 높아졌다. 정부는 10월 19일 통일부, 외교통상부, 국방부, 경찰, 국정원 등 유관기관 국장급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북 삐라 살포와 관련 범정부 대책회의를 열었다. 범정부 대책회의 후인 24일 통일부는 북한인권단체에 관계자를 보내 또 다시 삐라 살포 자제를 요청했다.

북한의 위협 후 급증했던 북한인권단체에 대한 후원금은 이 무렵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진영에서도 “북한이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우리 정부에 떠넘기게 하는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대북 삐라 살포 자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북한인권단체에 대한 야당과 좌파 단체들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민주당 崔宰誠(최재성) 대변인은 2008년 10월 29일 브리핑에서 “일부 극우단체들의 대북 삐라 살포는 시대에 뒤처진 불장난”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당 宋永吉(송영길) 의원도 11월 3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삐라에 실린 내용에 대해 “지저분한 이야기”로 표현했다.

이후에도 북한인권단체의 삐라 살포는 계속됐다. 2008년 11월 24일 북한은 “12월 1일부터 남북간 육로통행 제한 및 차단조치를 시행한다”고 예고했다. 같은 달 26일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 등을 ‘매국단체’라고 비난했다. 박상학씨는 이에 맞서 12월 1일 “오는 12월 2일 삐라 10만장을 살포하겠다”고 발표하자 최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 현안 브리핑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삐라를 계속 뿌리는 한 분명히 매국단체”라고 또 다시 맹비난했다.


◇ 2008년 12월 5일 오전, 대북 삐라 살포와 관련, 한나라당 당사에서 박희태 대표와 면담 도중 박상학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중단’과 ‘자제’ 사이에서

12월 2일 오전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은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삐라 10만장을 풍선 10개에 달아 날려보낼 계획이었지만 한국진보연대 등 좌파단체들의 저지로 1만장을 매단 풍선 한 개만 북쪽으로 보냈다.

이날 좌파단체들과의 몸싸움으로 박상학씨는 목에 깁스를 하는 부상을 당했다. 좌파 인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박씨는 지니고 있던 가스총을 꺼내 공중 발사했다가 경찰에 압수당했다. 이날 삐라 살포를 방해한 진보연대 핵심인사들은 2002년 ‘효순·미선양 범국민대책위’, 2005년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 ‘맥아더 동상 파괴시위’, ‘미국산 쇠고기수입반대 촛불시위’를 주도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은 다음날인 12월 3일 같은 장소에서 국민행동본부 등 우파단체들이 참석한 가운데 삐라 10만장을 다시 북으로 날려보냈다. 이날 박씨는 “좌익 세력을 뿌리 뽑고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는 날까지 전단 살포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이틀 후인 12월 5일, 박상학씨는 납북자가족모임 최성룡 대표와 함께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를 면담했다. 박 대표와 30분간 면담한 후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 합의문의 일부다.

‘박희태 대표는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의 충정을 이해하고, 대북 전단 살포가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어긋남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북한 측이 대북전단을 구실로 각종 대남 강경조치를 취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대승적 차원에서 대북전단 살포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권유에 따라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은 대북 전단 살포를 당분간 자제하고 북한의 태도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 합의문은 한나라당 박 대표와 박상학씨 측의 면담이 이루어지기 직전 결정된 내용이다. 삐라 살포를 잠시 멈추겠다고 한나라당과 합의를 해놓고도 박씨는 왜 눈물을 보였을까.

이날 박희태 대표와 박씨 일행의 면담 전 양측은 합의문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자제’와 ‘중단’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박 대표 측은 ‘살포 중단’을 합의문에 넣고 싶어했고 박씨 측은 ‘살포 자제’를 고집했다고 한다. 박씨 측의 요구대로 ‘자제’라는 단어를 합의문에 넣기로 한 후 박 대표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박씨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부가 관련기관 대책회의까지 열어가면서 ‘삐라 문제 대책’을 논의한 후에 후원금이 줄어들고 있다”면서 보수 진영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보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도, 한나라당도 중단하라고 말하니까 이제는 ‘보수’라고 알려진 목사님들까지 나서서 중단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요. 입 가진 사람들이면 다 중단하라고 말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도 하던 일인데 왜 보수 정권이라는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에 전단지를 보내면서 요즘처럼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기는 처음이에요.”

박상학씨의 눈물은 북한을 탈출한 후 남한 사회에 와서 북한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탈북자들의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심경을 대변하는 눈물은 아니었을까.

부친은 北送된 재일교포 출신

박상학씨는 1968년 중국과 접경 지역인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나 김책공대를 졸업했다. 北送(북송)교포 출신인 박씨의 부친은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 소속이었다. 일본 나가노현(長野縣)에서 태어난 부친은 스무 살 때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박씨의 모친과 함께 북송을 택했다고 한다.

북송 후 김책공대 체신학부를 나온 박씨의 부친은 무선통신 분야 과학기술자로 일하면서 인민군 무전기 현대화, 無線(무선) 폭파장치 등 군사 분야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한다. 또 소련 기술자들과 함께 초단파 중계소를 설립했다고 한다.

박씨 자신도 아버지가 졸업한 김책공대 체신학과 출신인데, 학교에 다닐 때 부친이 쓴 저서로 공부했다고 한다. 당시까지 북한에서 초단파 공학에 관한 저서는 박씨 부친이 쓴 것이 유일했다고 한다.

박씨의 부친은 1980년대 중반에는 노동당 과학기술부에 들어가 코콤(COCOM·對공산권 수출조정위원회) 관련 일을 했다. 코콤은 공산권의 위협을 막기 위해 수퍼 컴퓨터 등 軍需(군수) 물자가 공산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박씨의 부친이 맡은 일은 서방 세계로부터 공산권으로의 유입이 금지된 기술들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이 일 때문에 박씨 부친은 중국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소련, 유럽, 일본 등을 왕래했다고 한다.

과학기술부에서 활동 성과를 인정받은 박씨 부친은 1990년대 초 노동당 35호실로 스카우트돼 해외 업무에 종사했다. 이때부터 박씨의 가정환경은 확 바뀌게 된다. 노동당 11과 관리 대상이 된 것이다. 노동당 11과는 대남침투 임무 중 사망한 요원의 가족 등 혁명가가족을 국가가 특별히 돌보아 주는 곳이다. 박씨 가족도 혁명가가족 대우를 받는 특수층 신분이 된 것이다.

박씨는 김책공대 졸업 후인 1990년대 중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 산하 속도전 지도총국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일했다. 탈북 직전에는 외화벌이를 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국 38국 소속이었다. 인민군 안에서는 노른자위 자리였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엘리트 계층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박씨 가족이 탈북을 감행하게 된 것은 해외에 나가 있던 부친 때문이었다.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박씨의 부친은 1990년대 중반 일본 NHK에서 방영된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150만명 내지 200만명의 餓死者(아사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시체가 두만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

그 무렵 북한에서는 ‘35호실 사건’이 발생했다. 35호실 부장이었던 권희경이 대남 공작과 관련, 숙청된 것이다. ‘35호실’사건 발생 후 해외에 나가 있는 공작원들에 대한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씨 부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화벌이 실적 등이 좋았던 박씨의 부친은 사업마무리 등을 핑계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35호실 사건’으로 소환 명령 받은 부친

박씨의 부친은 보통 1년에 한 번씩 들어와 한 달 내지 두 달 정도 머무른 후 다시 해외로 나가곤 했다. 그런데 ‘35호실 사건’과 관련해 대외정보부 소속 해외근무요원들에게 소환령이 떨어진 것을 알 수 없었던 박씨 가족은 부친이 귀국할 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애가 탔다.

1999년 5월 박씨의 부친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박씨는 그 사람이 건네는 부친의 편지를 받아서 읽었다. 북한을 탈출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박씨는 부친의 편지를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처럼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분이 무엇 때문에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건 혹시 謀害(모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고요.”

박씨는 부친이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평양을 떠나기 전날 그를 다시 만났다. 박씨는 그 사람에게 평양에 다시 올 때 부친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그 사람은 한 달 후에 다시 오겠다면서 평양을 떠났다.

약속한 한 달이 지났지만 부친의 육성녹음을 가져오기로 약속했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박씨는 아버지로부터의 회신을 기다리던 그때 그 시간을 “일생일대에 최고로 스트레스를 받은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하루가 1년 같고 잠도 오지 않았어요. 잘못하면 요덕수용소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보위부에서 내막을 알고 밤에 덮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안 오면 나머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건가, 등등 온갖 걱정에 가슴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목숨 건 脫北

부친이 심부름을 보낸 그 사람은 평양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박씨를 찾아왔다. 1999년 7월 말이었다. 박씨는 그가 가져온 부친의 육성녹음을 들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부친이 틀림없었다. 그의 부친은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북한으로 왔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과 발음이 달랐다. 부친만의 독특한 사투리가 있었던 것이다. 부친은 압록강 건너 중국 쪽에 박씨 가족을 안내할 사람을 구해놓았다고 했다.

부친의 뜻을 확인한 박씨는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 설득에 들어갔다. “가지 않으면 죽고,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 땅을 떠나야 한다”고 설득했다. 다행히 가족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문제는 그의 약혼녀였다. 그는 약혼녀와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함께 탈북을 하고 싶었지만 가다가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길이었기 때문에 차마 함께 가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연좌제로 인한 피해를 입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자신의 가족은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의 약혼녀만은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박씨는 약혼녀를 고향에 남겨두기로 했다.

탈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박씨는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가 나고 자란 고향 혜산에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중국을 오가며 밀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통해 인민군 국경 경비대 초소장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박씨는 초소장에게 큰 물건을 날라야 한다며 박씨 가족이 지나갈 국경 좌우로 200m 정도를 비워달라고 부탁했다. 경비대 초소장에게는 중국에서 돌아올 때는 처음에 준 돈의 두 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 사용할 자동차 튜브도 구했다.



◇ 경기도 김포 월곶면 문수산에서 박상학 대표가 대북 삐라를 담은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내고 있다. (2008년 11월 20일 오전)


1999년 8월의 어느 날 새벽 1시. 박씨네 4명의 가족은 압록강을 건넜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튜브에 태우고 박씨와 남동생은 헤엄을 치며 강을 건넜다. 불빛 없는 북한 쪽은 어두웠고 강 건너 중국에는 불빛들이 많았다. 강 건너편에 다다를 때까지 등골이 서늘했다. 뒤에서 총을 쏘는 것은 아닐까, 국경 경비대가 자기들끼리 짜고 국경을 넘게 한 다음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것은 아닐까, 오만 가지 생각이 박씨의 뇌리를 스쳤다.

유사시를 대비해 박씨네 가족은 면도칼을 지니고 있었다. 잡혀서 고문당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중간쯤에 왔을 때 비로소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이번에는 중국 국경 쪽에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 정말 와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중국 쪽에는 차량을 가지고 사람이 마중나와 있었다. 젖은 옷 채로 차에 올라타 은신처가 마련된 옌지(延吉)로 향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쏟아졌다. 박씨는 그렇게 사흘을 잔 후에야 깨어났다. 이듬해인 2000년 2월 박씨의 가족은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남한에 도착한 후 박씨는 통일정보신문 기자, 서울대 모바일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는 등 평범한 생활을 했다. 같은 탈북자로 인민군 장교 출신인 아내를 만나 아이도 낳았다. 일가족이 함께 탈북했기 때문인지 박씨네의 생활은 남한 사회의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랬던 그가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북한에 남아 있던 叔父(숙부)들과 사촌들의 소식을 듣고 난 후였다. 박씨의 부친은 재일 조총련 교포 북송 당시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맞아 죽은 숙부들 소식 듣고 북한민주화 운동 시작

북한을 떠난 지 만 2년이 지난 2002년 늦여름에 박씨는 그와 고향이 같은 탈북자를 만났다. 북한에서 안전원을 지낸 탈북자로, 박씨의 삼촌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 그는 박씨 일가족이 탈북한 직후 그의 숙부들이 보위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또 사촌들은 동냥으로 빌어먹는 꽃제비가 된 후 어느 곳으로 사라졌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박씨는 삼촌과 사촌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한다.

“사실 우리 가족이 북한에서 넉넉하게 살았기 때문에 金正日(김정일)을 싫어하기는 해도 격렬한 분노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삼촌과 조카들의 소식을 듣자 ‘이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더군요.”

그날로 박성학씨는 북한인권개선과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운동 방식은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것이었다. 남북 장관급 회담 등으로 북한 대표단이 남한을 방문할 때는 어김없이 행사장 주변에 나타나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과 김정일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 대가로 김정일의 북한에서는 단 한 번도 안전부에 끌려가 본적이 없는 박씨였지만 남한 사회에 와서는 경찰서에 12번 끌려가 길게는 5일, 짧게는 2일씩 구류를 살아야 했다.

필자와 만났을 때도 박상학씨는 ‘행동하는 운동가’의 흔적이 생생했다. 목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12월 2일 임진각에서 벌어진 좌파 단체들과의 실랑이 때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박씨는 그의 경호를 맡고 있는 경찰관과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우리의 책무

―정부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삐라 살포를 강행하는 이유는.

“우리가 남한에 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느꼈던 생활 체험과 그 현실을 사실 그대로 북한에 두고 온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야 된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삐라 살포가 계속되면서 개성공단 사업 등 남북관계 경색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가 날리는 전단지 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전단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보냈고 내용도 비슷합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장본인이라는 책임을 다 뒤집어씌우는데,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지금의 남북관계 경색은 전단지와 상관없이 북한이 오래 전부터 기획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해 온 일인데 왜 북한이 이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이유는 전단지 내용이 북한 정권의 폐부를 찌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잘 알아요. 북한에서 제일 위험시 하고, 제일 비밀에 부치는 게 수령의 사생활이거든요. 전단지의 내용은 사실 그대로를 쓴 겁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건 자기들 스스로 허위 위에 세워진 정권이라는 것을 자백하는 겁니다.”

―삐라에 돈을 넣어 보내면서 북한 주민들의 삐라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 이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단지에 돈을 넣은 것은 지난 2008년 4월부터입니다. 1달러나 5위안, 10위안 지폐는 북한 암시장에서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어요. 그 정도면 북한 주민들의 한 달 월급이거든요.”

―전단지에 돈을 넣은 것은 누구 아이디어였습니까.

“처음에는 전단지에다 초콜릿이나 스타킹을 넣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제가 돈을 넣어서 보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북한 주민이 그 돈을 주워서 밥 한끼라도 따뜻하게 해먹으면 전단지에 관심을 기울일 것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죠.”

―전단지마다 다 돈을 넣는 것은 아니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우리 단체의 재정 형편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전단지 10만장을 보낼 때 전에는 300~400달러 정도씩 넣어 보내다가 지금은 1000달러씩을 넣어 보내고 있습니다.”

통일부 지원 1원도 못 받아

―5000만 동포들이 한 달에 1달러씩 풍선에 매달아 북한으로 보내자는 제안도 있었는데요.

“그런 글을 읽었습니다. 북한 동포들을 우리 국민 개개인이 직접 구제하자는 주장인데, 진정으로 북한 주민을 생각하고 김정일을 미워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생각해봐야 할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1달러는 북한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입니다.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삐라에 돈을 넣기 前(전)과 後(후)의 효과 차이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까.

“국경 지역에 사는 북한 주민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남조선으로 간 탈북자들이 전단지에 달러를 넣어서 보내는데 황해도에서는 그 전에는 별로 줍지도 않던 전단지를 주우려고 난리’라고 했답니다. 황해도에서 벌어진 일이 전단지에 돈을 넣은 후 북쪽 국경 지역까지 소문이 전해진 거죠.”

―통일부의 자제 요청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제가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사무국장으로, 대표로 일을 했습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통일부 산하의 사단법인 단체입니다. 그때 제가 통일부에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통일부는 단 1원도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利敵(이적) 불법단체라고 지정된 한총련이라든가 이런 단체들이 북한에 갈 때는 경비도 대주고 말이죠. 대한민국의 통일부가 아니라 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부 같은 일을 해온 겁니다.”

―자제 요청이라고는 하지만 압력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까.

“압력에 가깝죠. 통일부 직원이 우리 사무실에 두 번이나 왔거든요. 처음에 왔을 때는 그 직원이 ‘박 대표님도 대한민국의 국민 아니냐, 정부가 하는 이야기 들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 맞다’고 했어요.”

대북 인권 관련 단체들이 비닐풍선에 수소를 주입해 대량으로 북한에 삐라를 보내는 사업을 본격화한 것은 2004년이다. 2003년에도 사업을 했지만 그때는 문구점에서 풍선을 100개, 200개씩 사다가 삐라를 몇 장 달아서 DMZ 부근에서 北風(북풍)을 이용해 보내는 수준이었다. 북한 인권 관련 단체가 2008년 11월 말 현재 북한에 보낸 삐라는 총 900만장에 달한다.

―12월 2일 임진각에서 삐라를 살포하려다가 좌파단체들과 실랑이가 벌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대북 삐라 살포가 결과적으로는 南南(남남) 갈등도 야기시키고 있는데요.

“김정일은 남남 갈등을 바라고 있습니다. 전단지 살포 때문에 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상한 소리를 했고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까지 가세해 한나라당, 자유선진당과 이념 논쟁까지 벌어졌죠. 그러나 저는 이 상황을 남남 갈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김정일 추종세력 대 대한민국 사수세력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 아무리 공갈 협박을 해도 우리는 전단지를 계속 보낼 겁니다.”

삐라는 先軍독재에 맞서 싸우는 무기

―대북 삐라 살포를 중단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중단’이 아니라 ‘자제’입니다. 북한의 변화를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변화가 없으면 북한이 아무리 공갈 협박을 해도 우리는 북한에 전단지를 보내는 사업을 계속할 겁니다. 남한 사람들과 탈북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김정일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두고 온 부모 형제들에게 남한 사회의 소식과 김정일의 감춰진 진실을 전해주겠다는데 이걸 왜 막습니까.”

―북한의 인권 개선과 민주화를 위한 방법으로 대북 삐라 살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국민들이 전단지 보내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국민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고, 자유로운 언론이 없는 나라입니다. 남한의 1950년대를 생각하면 되거든요. 그때 남한도 선진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희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북한은 그 이상이죠.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북한 사람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남한 국민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북한의 환경상, 체제상 전단지가 제일 쉽고 유익한 겁니다.”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방송의 효과도 크다고 들었는데요.

“라디오가 있지만 소유한 사람은 주민 10명 중 1명꼴도 안 됩니다. 라디오는 구입해서 들어야 하지만 전단지는 하늘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그냥 받아보면 됩니다. 아주 아날로그 방식이라 요즘 분들이 우리 사업을 보면 웃지만, 북한 환경에는 이 방식이 최고로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보내는 전단지는 억눌려 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는 호소문이고, 거기에 적힌 사실들은 북한 주민들이 先軍(선군)독재를 반대해서 싸우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북한의 先軍독재에는 침묵하는가?

―북한민주화 운동의 최종 목표는 무업니까.

“김정일 선군독재를 타도하는 거죠. 우리가 평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양을 키우는 농장에 늑대가 있다면 그 늑대를 그냥 내버려두고 양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습니까. 늑대를 잡아야죠. 김정일을 잡아야 우리 대한민국이 안전한 것이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겁니다. 남한에 와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분들에게 박정희 독재가 어떻고 전두환 독재가 어떻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독재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두환 정권,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의 선군독재에 대해서는 침묵합니까. 자유를 압박하는 그 압제자를 타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제가 볼 때 박정희 독재나 전두환 독재보다 김정일의 독재는 백 배 천 배 더 심합니다.”

―북한에 살면서 남한 사회 소식은 언제 접했습니까.

“일본에는 할머니와 큰아버님이 계셨는데 1980년대 초반 조국방문단으로 북한에 오셨어요. 열흘쯤 북한에 머무는 동안 우리 집에 와서도 하루 묵고 갔습니다. 자는 시간에는 안내원들이 자리를 비켜주기 때문에 친척끼리 속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그때 일본에서 함께 온 사촌 누나가 ‘야, 이거는 사람 사는 데가 아니다’하는 거예요. 제 나이 15세 때였는데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는 가까운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 아버지는 중앙당 후보위원급(차관급) 이상부터 볼 수 있는 <참고신문>이라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저도 친구를 통해서 그 신문을 볼 수 있었어요. 원래는 가족들도 봐서는 안 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되는 신문이에요. 그 신문에 남한판이 있는데 북한 주민들이 도저히 접할 수 없는 남한과 관련된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북한이 對內(대내)용으로 발행하는 <참고신문>은 8면으로 국제정세 및 남한소식을 싣고 있다고 한다. 해외 소식을 거의 여과 없이 싣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참고신문>에서는 남한과 관련된 어떤 정보를 읽었습니까.

“남한의 수출액이라든가 수입액 그런 게 나왔어요. 제가 그걸 보고 놀랐어요. 북한 하고 대비해보니까 비교가 안 됐거든요.”

KBS 사회교육방송 많이 들어

―남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남보다 많았던 셈이네요.

“김일성 종합대학이라든가 김책공대쯤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는 북한 사회에서 대부분 엘리트급이잖습니까.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죠. 멀쩡하게 모여 있을 때는 장군님께 충성하자고 하지만 술 마시고 취했을 때는 ‘장군님은 무슨 말라빠진 장군이야. 저런 바보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도 모르고’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동료들의 말을 통해서 북한의 실상을 조금씩 알게 되는 거죠.”

―라디오는 없었습니까.

“조그마한 소니 라디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녹음도 되고 라디오도 되는 제품이었죠. 남몰래 들을 수 있는 리시버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밤에 조용히 듣습니다. 원래 라디오를 갖고 있으면 검열을 통해 남한방송을 못 듣도록 주파수를 고정해놔야 합니다. 저는 검열을 안 받고 가지고 있었던 거죠. 주로 KBS사회교육방송을 들었어요. 제일 흥미있게 들은 게 노동당 간부들 이야기 하고 탈북자들이 출연해서 이야기하는 ‘내가 본 서울’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남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죠. 그런데도 그게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과는 또 엄청나게 다르더군요. 실제 남한 사회에 대해 놀란 거는 제가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남한 사회를 직접 제 눈으로 봤을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김정일에 대한 분노로 북한 인권 개선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한 사회 친북좌파 단체에 대한 분노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북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랬다면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그렇게 극렬하게 북한을 추종하고 찬동한다는 게 참 얄밉죠.”

―탈북자에 대한 남한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못마땅할 때가 많으시죠.

“저는 북한만 거짓된 사회라고 생각했는데 남한에 와서 보니까, 특히 좌파 쪽 사람들이 비상식을 상식처럼 만들어버리더군요. 저는 친북좌파들의 속내와 그들의 거짓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전면에 나가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거기서 살아봤느냐, 나는 체험자다. 네가 뭐 안다고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말을 해, 이 사기꾼아’하고 말이죠. 그러면 대답을 못합니다.”

―남한 사회에서는 탈북자들에 대해 ‘북한에서 죄를 짓고 온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요.

“그런 분들이 있죠. 그런데 죄를 짓고 어떻게 여기에 옵니까. 죄를 지었으면 북한에서 먼저 잡혀가서 죽죠. 죄를 안 지어야 감시도 당하지 않고 탈북도 할 수 있는 거죠.”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다, 하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가족을 버렸느냐, 김정일이 우리에게서 가족을 빼앗았지. 너도 김정일처럼 얘기하고 있구나’하고 말이죠.”

남한에 와서 좋은 것은 물과 전기

―남한에 와서 가장 좋았던 것은 어떤 점입니까.

“제일 좋았던 것은 24시간 전기가 흐르고, 하루 종일 더운 물, 찬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는요.

“저는 북한에 있을 때 기린 맥주도 마실 수 있었고 일제 퓨마 신발도 신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은 몰랐어요. 그런데 토요일은 항상 걱정이 됐습니다. 토요일에는 노동당 생활총화가 있는데 자아비판을 해야 합니다. 그날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자기 비판하는 것은 만들어서 할 수 있어서 괜찮은데 꼭 호상비판을 해야 해요. 가까운 사람이지만 동지 한 사람은 꼭 비판을 해야 해요. 그게 그렇게 부담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오니까 토요일에 생활총화 안 하는 게 최고로 좋더라고요.”

박상학씨는 2008년 9월 23일 미국을 방문,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미얀마, 티베트 등 10개국의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박씨가 북한에 살포하고 있는 삐라를 부시에게 보여주자 부시는, “번역해 읽어보겠다”며 한 장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하고 다시 만날 계획이 있다면서요?

“2009년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텍사스주 댈러스에 자유연구소를 만들 예정인데 연구소 문을 열 때 꼭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2009년 5~6월경이 될 것 같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던가요.

“부시 대통령이 다른 참석자들보다 저와 세 배 이상 얘기를 많이 했어요. 부시 대통령은 탈북자들이 어려운 조건에서 북한의 자유를 위해 힘든 일을 하고 있다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저도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남의 나라 대통령도 북한 민주화와 인권개선 문제에 관심을 쏟아주는데 정작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관심을 별로 두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하지는 않았습니까.

“무관심한 것인지 무심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대통령들은 탈북자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야 북한하고 코드가 맞아서 그렇다 쳐도 이명박 대통령까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수 우파들이 왜 이명박 대통령을 뽑았겠습니까. 체제 사수를 확실히 하라는 뜻 아닙니까.”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한 사회에 와서 살면서 가장 싫은 게 무엇인가를 물었다.

“참혹하게 죽어간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냉대하고 무시하면서도 입만 열면 민족이요, 우리끼리요, 공조요, 평화니 하는 이중적인 남한의 정치권과 친북좌파들이 가장 싫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일부 국민들의 무관심도 답답합니다.”

아무래도 김정일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남한 내 친북 좌파 세력과 벌이는 박성학씨와 북한 인권 단체들의 힘겨운 싸움은 계속돼야 할 것 같다.⊙

북한에 뿌려지는 삐라의 실물을 드립니다

현재 북한인권단체가 북한 지역에 살포하는 삐라는 두 종류로, 자유북한운동연합에서 제작하는 것과 납북자가족모임에서 제작하는 삐라가 있다. 자유북한운동연합에서 살포하는 삐라는 金正日(김정일) 출생의 비밀 등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납북자가족모임이 제작해 살포하는 삐라는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이 북한 지역에 보내는 삐라의 크기는 가로 25㎝, 세로 20㎝다. 물에 젖어도 훼손되지 않고 쉽게 찢어지지 않도록 비닐에 문구를 인쇄한다. 삐라는 봉투 형식으로 만들어져 2008년 4월부터는 그 안에 1달러 혹은 10위안, 5위안을 넣어 북한 지역에 살포하고 있다. 삐라에 지폐를 넣어 보낸 후 북한 주민들의 삐라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소가스를 채운 길이 12~15m 자루 형태의 대형 비닐풍선에 대략 1만장씩 삐라를 매달아 북한으로 날린다. 대부분 황해도와 강원도에 떨어지지만 바람의 방향과 속도가 맞으면 평양 이북까지도 날아간다고 한다.

북한은 대북 인권단체의 삐라 살포와 관련, 군사적 위협과 함께 남북간 陸路(육로)통행 제한 및 차단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이 실린 삐라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관심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대북 삐라 살포는 현재 휴지기를 맞고 있다. 북한과 남한 내 친북좌파들이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을 대북 삐라 살포에서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단체는 남북 관계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없을 경우 언제든지 대북 삐라 살포를 재개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두 대북 인권 단체는 대북 삐라 살포와 관련 친북좌파들의 공격과 정부의 비협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삐라의 제작과 살포는 뜻있는 분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후원 계좌는 국민은행 533901-04-004327, 농협 237075-52-071505이다.

월간조선 바로가기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