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열 /고려대 교수·북한학

금년 3월 북측의 일방적 선언으로 중단되었던 남북 장관급회담이 지난 주말 재개되어 3박4일간의 회담 일정을 마치고 18일 오전 공동보도문을 발표하면서 폐막되었다. 공동보도문은 전체적으로 지난해 채택된 6·15공동선언을 이행한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민족의 화해와 단합, 이산가족문제, 민족경제의 균형발전과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협력, 당국간 회담 개최 등 5개항으로 나누어 각 분야별 사업추진 내역과 일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합의된 사항들은 대부분 지난 4차 장관급회담과 각급 실무회의에서 이미 합의했거나 논의되었던 내용들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중단되었던 남북 당국간 회담이 재개되고 6차 장관급회담 개최 일정에도 합의함으로써 회담 정례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향후 양측이 각종 후속회의를 통해 사업추진을 논의하기로 함으로써 남북협력사업의 활성화에 대한 기대를 높여준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 당국간 합의가 구체적 성과를 도출하기까지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산적하고 있어 남북관계의 진정한 개선에 대해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우선 6개월간의 침묵을 깨고 돌연 당국간 회담에 나선 북측의 의도와 전략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과 남한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북한이 비록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과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의 평양 방문을 통해 대내외적 상황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남북 당국간 회담에 응하는 상황변화로 보기엔 어딘지 어설픈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8·15평양축전에서의 불상사에 대한 남한 사회의 비판적 반응과 국회에서의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 통과 및 DJP 공조파기에 따른 남한 정치권 지각변동에 대한 대응수단으로 당국간 회담에 응한 것은 아닌지, 회담 직전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참사와 이에 대한 미국 및 국제사회의 반응이 북한의 회담 전략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북한의 타협적 태도와 전략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수단이며 이에 따라 이루어진 합의 역시 이같은 조건에서만 가능한 한정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의도했던 남북 반테러선언이나 김 위원장의 서울답방 문제에 대해 북측은 처음부터 의제로 삼지 않았다거나 이산가족문제에 대해 기존의 상봉방식에서 조금도 진전을 이루지 못했던 점 등은 이번 회담의 이같은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서는 무려 9개 사항에 대해 합의하고 일부는 구체적 실무회의의 날짜까지 명시하였다. 이를 위해 우리 회담대표들이 애쓴 흔적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나 구체적 성과는 대부분 향후 개최될 후속회담의 진전 여부에 달려있다. 경의선 복원과 금강산 육로개설, 임진강 수방대책 및 영해통과 문제 등은 양측 군 당국간의 협의와 협조에 전적으로 그 성패가 달려있다.

더구나 경제실무회담에서 다룰 사항들은 합의문에는 제외된 전력협력 문제를 포함하여 엄청난 비용이 수반되는 사업들이어서 이에 대한 전망 역시 현재로서는 매우 불투명한 실정이다. 국내 경제사정의 부진과 미국 테러사건 여파로 위축된 남북경협의 분위기가 회복되기까지는 상당기간이 필요할 것이며 퍼주기식 대북지원에 대한 의구심 역시 쉽게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또한 여소야대의 국회 역시 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다짐하고 있어 남북이 합의한 사항들이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북측은 6·15공동선언의 진정한 의미와 남북관계의 본질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보다는 구체적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하여야 할 것이며 우리 정부 역시 남북문제를 민족문제라는 이상 아래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버리고 사회적 다양성과 정치적 현실을 존중하면서 시장경제 논리에 충실한 현실주의적 자세를 갖춰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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