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한강 둔치에서 북한에 씨감자를 보내어 양식 자급자족을 돕는 운동의 일환으로 감자꽃축제가 있었다. 가난한 시골 처녀 순이의 해진 삼베적삼 틈으로 드러난 속살이 연상된다는 감자꽃이다. 먹을 것이 떨어진 데다 가물기만 하는 보릿고개의 땡볕에 피어 있는 꽃이라 빈곤 이미지와 맥락된 때문일 것이다. 산촌에서는 아녀자들이 밭을 맬 때 이 감자꽃 꺾어 머리에 꽂는 관행이 있었다. 산골 소녀들의 작은 감상 노출이 아니다. 감자꽃을 꽂으면 더위를 먹지않는다는 것은 명분이요, 감자의 주력(주력)이 옮아 아이를 많이 잘 낳는 다산력을 얻는다고 안 때문이다.

감자줄기를 뽑으면 크고 작은 감자가 줄줄이 달려나오듯이 아기를 많이 갖게 된다는 유감주술(유감주술)에서 감자꽃꽂이의 풍습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영문 모르고 감자꽃 많이 꽂고 마을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보고 달려가 남보기 망측하다 하여 뽑아버리곤 했던 것이다. 영국의 북부지방에서 부인들이 감자를 속곳에 꿰매넣고 다닌 것이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남주인공인 브룸이 호주머니에 감자를 넣고 다녔던 것도 한국 아가씨들이 감자꽃 머리에 꽂고 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감자를 지니고 다니면 생식력이 강해진다고 알았던 것은 동서가 다르지 않았다.

18세기 말께 프랑스는 혹심한 기근이 몰아쳐 서너 사람 중에 하나꼴로 죽어나갔다. 이를 구제하는 길은 가뭄에 강하고 유럽의 박토에도 잘 자라며 단위면적 당 소출도 많은 감자를 먹는 길밖에 없었다. 한데 감자가 유럽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하여 먹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알았다. 먹으면 문둥병에 걸리고, 감자 눈을 먹으면 죽는 것으로 알았다.

이에 당시 루이16세는 감자꽃을 단춧구멍에 꽂고,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는 감자꽃을 머리에 꽂고 살았으며 거리에 나가 직접 만든 감자 요리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냠냠 먹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프랑스의 기근 극복을 ‘감자꽃의 승리’로 표현한다. 아일랜드가 그러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극악의 기근에서 살려낸 것이 감자다. 그래서 기후나 토질이 흡사한 북한 땅에 감자꽃이 만발했던가 평양 다녀온 일행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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