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역사학자인 미국 예일 대학 폴 케네디(Paul Kennedy) 교수가 전주대학교 국제국가전략연구소(소장 박성수·박성수 총장) 초청으로 3~6일 서울을 방문,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대전략(grand strategy)과 경쟁력을 큰 주제로 세 차례의 강연을 했다.

그는 '강대국의 흥망’(1987년), ‘21세기 준비’(1993년)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는 4일 오후 그의 호텔 방에서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편집자



―한국의 장기적 목표를 말한다면, 적어도 4강대국 속에서 정치적 독립과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것이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우리 주변이나 국제사회에 대해 좀 더 큰 발언권을 갖고 영향을 끼치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한국의 대전략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만일 북한이 계속해서 가난하고 군사적으로 위험하며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있는다면 한국은 그런 이상적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장기 전략은 무엇보다도 평화적 민주적으로 북한과 통합을 이룩하고, 그런 연후에 통일 한국이 이 지역 강대국들 사이에서 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이 통일 성취를 위해 민족 내외적으로 형성해야 할 조건들은 어떤 것이라 보는가?

▲첫째로, 통일은 군사적 충돌 없이 달성돼야 한다. 한반도 주변엔 불안정한 국가들이 너무 많다. 강대국들이 한반도 유사시에 각자 어떻게 대응할지 알 수 없으므로, 군사적 충돌은 절대 없어야 한다. 둘째로, 유엔 후원 하에 남북한 간 협상을 유도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거 한반도 문제에는 늘 유엔이 개입됐기 때문이다. 셋째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sensitivity)가 필요하다. 동독인들은 서독과의 통합 과정에서 문화적·심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 남·북한의 격차는 과거 동·서독의 격차보다 훨씬 크다.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되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하지만 한국은 천연자원이 별로 없다. 있는 것이라곤 잘 교육된 양질의 인력뿐이다. 그나마 고임금으로 인해 제조업 분야에서의 국제 경쟁력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의 출구는 어디라고 보는가?

▲수년전 세계은행 자료를 보았는데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위스와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이었다. 그런데 UAE는 부의 원천이 오로지 석유다. 그나마 미국과 영국 회사들이 퍼올리는 것이다. 스위스는 목재 정도 외에는 별로 자원이 없지만, 공학 기술 수준이 높고, 국제금융의 중심지이며, 관광산업이 발달해 있고, 국민들의 교육 수준도 높다.

한국은 제조업 한 분야가 아니라 3~4개 분야에서 두루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제조업만 해도 좀더 고부가가치 분야, 예를 들면 전자산업 대신 제약업 같은 쪽으로 발전해야 하고, 디자인·패션·의류·가구 등에서 고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도 별 자원은 없지만 그렇게 해서 잘 산다. 스위스나 이탈리아나 물가가 비싼 나라들이지만, 관광객들이 많고 관광산업이 발달해 있다. 한국은 전자제품과 소형자동차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왔지만, 이제 경쟁력을 잃고 있다. 다양한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서구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이견 조정에 서투르고, 통합의 정치보다는 분열과 대립의 정치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을 더 배워야 할 것인가?

▲한국이 정치적으로 미숙한 것은 당연하다. 일본의 식민지, 2차 대전, 분단, 한국전쟁 등을 겪고서 이제 겨우 반세기다. 영국 의회는 13세기부터 있었고 700년 동안 많은 문제들을 겪었다. 한국은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상당히 잘 하고 있다.

물론 한국 정치인들은 아직도 대립적이고 감정적이다. 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대학 시절부터 토론과 타협과 협상을 교육받으면서 길러진다. 정치 발전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선진 민주주의는 헌법적 절차와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서로 정반대이지만, 다 신사도를 지킨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해 엄청나게 중요하다. 정치과정이 국민들에게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북한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 지배층은 개혁과 개방이야말로 그들 체제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북한은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가능한 한 유연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는 낙후된 폐쇄사회의 전형적 딜레마다. 북한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고, 고르바초프 때의 구소련도 같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개방하지 않으면 더욱 더 낙후되고, 개방하면 변화하게 된다. 어쩌면 아주 극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더는 말할 수 없다. 결코 선택이 쉽지 않은 두 갈래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뿐이다. 그러나 변화는 시도해볼만 한 길일 것이다.

―중국도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방해나가고 있다. 과연 서구적 합리주의가 중국의 유교적 사고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유지될 것인가, 아니면 무너질 것인가. 어느 것이 좋은 것인가?

▲나는 서구의 합리주의가 온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올림픽을 유치하는 등 대단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하지만 점진적인 변화가 바람직하다. 중국이 바깥 세계를 받아들이고 현대화, 세계화한다고 해도 문화적 정체성과 유산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중국 문화는 너무 크고 강하다. 중국 문화를 서구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균형자(balancer), 평화유지자(pacifier) 역할을 언제까지 어떤 조건 속에서 계속해나갈 것으로 보는가?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안보 약속에 변화를 가져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보수적이다. 파월 국무장관, 체니 부통령, 럼즈펠드 국방장관 모두가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다. 현상(status quo) 유지를 바라고 있다.

―헌팅턴은 세계적 문화 충돌을 예견했는데,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는 형성됐다고 보는가?
전혀 별개의 두 질문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지만,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갈라져 있다.

중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을 의심한다.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을 싫어하고, 북아일랜드에서는 종교 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아랍과 이스라엘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실로 문화적 적대주의는 엄존하고 있다. 체첸 사람들, 아프간 사람들, 파키스탄 사람들, 캐시미르 사람들은 계속 싸울 것이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향후 20년까지는 형성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아직 세계에는 너무나 분쟁의 소지가 많다. 현대화와 세계화는 너무 많은 나라에서 너무 많은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도네시아·파키스탄·중동 등, 취약한 사회가 너무 많다. 아직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찾아볼 수 없다.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우리는 요즘 세계적 동시 불황을 겪고 있다. 세계화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있다고 보나?

▲나는 경제전문가는 아니니까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권위있는 분석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지금 여러 곳에서 보는 어려움은 저마다의 사정에 의한 우연의 일치들일 뿐, 세계화로 인한 문제의 동시 발생은 아닐 것이다. 세계화를 비난할 수는 없다.





폴 케네디 -美예일대교수
·1945년 영국 월센드(Wallsend) 태생
·영국 뉴캐슬대 학사, 옥스퍼드대 박사
·영국 왕립역사학술원, 미국 학술원 회원
·미국 예일대 국제안보연구소장




'한반도 주변 강대국'강연

"美 최강국 계속 유지, 日경제력 서서히 위축"

폴 케네디 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4강의 주요 국력지표와 지정학적 위치 및 국내정치적 강·약점 등을 비교 분석하면서, 적어도 향후 수십년간 미국은 세계에서 필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의 최강국 지위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의 인구는 세계 전체의 4%에 불과하지만, 국내총생산액은 세계의 29%를 차지하며, 군사비 지출은 세계 전체의 36%, 인터넷 사용 인구는 세계전체의 40%, 지난 25년간 노벨 물리학·화학·의학·경제학상 수상자 숫자는 세계 전체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기초과학·기술 분야는 아직 수준이 낮고 독창성은 미미하며, 군사력도 첨단 수준은 아닌 것으로 케네디 교수는 평가했다. 중국은 2015년에는 70세 이상 인구가 3억여명에 이르러 사회적 부담이 될 것으로 지적됐다.

일본의 경제력은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하고 있으며, 전자산업·기술 분야는 발달해 있지만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최근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정도로 독창적 연구 실적이 미국에 비해 크게 뒤지고 있다. 케네디 교수는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에 대해 “독일처럼 진지하고 개방적으로 과거의 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어 문제”라고 비판했다.

러시아는 인구와 경제력, 군사력, 기초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지난 10여년간 계속 쇠퇴해 왔다.

미국이 머지않아 다른 강대국들에 우월적 위치를 추월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 케네디 교수는 국내총생산액, 군사비 지출, 인터넷 사용 인구, 노벨상 과학·경제학 분야 수상자 등 몇 가지 기준에서 모두, 중국·일본·러시아 세 나라를 다 합쳐도 미국에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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