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국회는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햇볕정책의 전략적 발상과 정책 수행 방식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김대중 정부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의안 통과 후 현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대응 방식은 국회 의사를 수용하기는커녕 더욱 오기를 부리고 있는 인상이다.

장관 한 명의 거취 문제로 끝낼 수 있는 일을 스스로 ‘남북문제의 근본과 관련된 사항”이라고 확대 해석한 초반 대응방식에서부터 “직접 국민을 상대하는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거나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후 논평에서 그 오기는 충천하고 있다.

정부가 임동원 해임 결의안 통과에 담긴 교훈 읽기를 외면하고 기존의 햇볕정책 추진 방식과 속도에 집착할 경우 앞으로 더욱 큰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다. 의회민주주의에서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 다수의사를 뛰어 넘고, 비판적 언론은 억눌러가면서 이 정권이 직접 상대하고자 하는 국민은 도대체 어떤 국민인지가 의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소수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대북정책에 대한 재검토도 이 같은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엄청난 국민의 세금과 국가 예산이 소요되는 대북정책에 대해 국회의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야당의 목소리를 최대한 수용함으써 국민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번 해임건의안 사태는 일련의 남북당국 간 협상이 완전 중단상태에 빠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마저 불투명해진 상태에서 정부가 당연히 지켜야 할 법과 원칙들을 방기한 채 8·15평양축전 참가를 성급하고 무리하게 추진한 데서 발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연히 그 정책 추진의 실무책임자인 임동원 장관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햇볕정책을 유지하겠다는 김 대통령의 태도는 대북정책을 국내정치 상황과 연관짓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북한 당국이 해임결의안 처리 전날 돌연 남북대화를 제의하고 나선 데서는 북한이 한국의 국내정치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의심되기도 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북정책에 관한 한 김 대통령 자신의 신뢰성이 적잖은 타격을 입고 있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다. 김 대통령은 올해 신년 연두기자회견과 국민과의 대화에서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이 주한미군철수 문제에 관해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인정했다고 강조했고, 이를 햇볕정책의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로 인용했다. 그러나 지난 8월 김정일 위원장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에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개인적 신뢰성에 심각한 훼손을 가한 것이다.

굳이 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햇볕정책 추진 방식이나 속도에 대해 다수 국민이 거부감을 갖고 있음은 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방식은 일반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북한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를 얻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국회와 국민의 다수 의견을 폭넓게 포용해야 한다. 또 다수 야당인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선별적 정책공조를 통해 정부의 대북정책을 적절히 견제함으로써 책임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여야의 이 같은 변화된 모습만이 햇볕정책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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