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지금 우리 정부가 처한 모습은 70년대 초반 서독 최초의 좌파 정권이 겪었던 위기 상황을 그대로 갖다 놓은 듯하다.
동독과의 화해를 표방한 동방정책을 내걸고 69년 집권한 서독의 브란트 정부는 생각보다 일찍 위기에 빠져들었다. 국내 경기는 가라앉고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넘나들었다.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1972년)를 실증이라도 하듯 국제경제에도 오일쇼크가 몰아 닥쳤다. 국내 좌파와 노조의 과도한 요구도 정부를 더욱 궁지로 몰아 넣었다. 동방정책에 대한 보수 야당의 공격도 갈수록 거세졌고, 사민당과 연정을 이루고 있던 자민당도 흔들렸다.

학교에 지각하거나 결석한 학생들이 “브란트의 선거 벽보를 붙이느라”라는 말로 사유를 대신하면 된다고 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던 브란트는 벼랑 끝에 서게 됐다.

이때 그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동독이었다. 브란트의 개인 수행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비밀정보기관(슈타지) 소속 대위 계급의 간첩임이 드러났고, 그는 결국 74년 5월 불명예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란트가 하필이면 ‘좋은 이웃’이 되고 싶었던 동독 때문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칸츨러(독일 총리)’의 저자 귀도 크놉은 지적한다.

지금 한국은 국내외 경제 위기와 이념 갈등이 겹친 데다 이 정부가 그토록 화해를 갈망하던 북한으로부터도 ‘배신’의 몸짓이 뚜렷하다. 8·15 평양 축전 소동은 북한이 남북 당국 간 대화는 전면 동결해 놓고 남한의 민간단체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자신들이 짜놓은 각본에 동원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 뒤통수 치기에 다름 아니며, 남북 간 신뢰의 기반을 허물어버렸다는 점에서 독일의 기욤사건과 본질적 성격이 다르지 않다.

브란트는 기욤사건 후 동독을, 동방정책 추진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던 ‘공산당 국가’라고 지칭함으로써 분노를 표했으나 응징조치는 자제한 채 자신이 사임함으로써 동방정책을 구해냈다. 그러나 브란트 이후 서독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동독이 화해의 대상이면서도 적대적 존재라는 상황의 이중성을 직시하게 되면서 슈미트 총리에 의해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선회함으로써 역사적 사명을 이어가게 된다.

지금 우리의 대북 햇볕정책은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내 여론과 경제 상황, 미국의 태도 등은 그 어느 것도 현재 방식의 햇볕정책에 우호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원인의 본질은 결코 상황에 있지 않다. 북한과의 화해 추구라는 햇볕정책의 철학은 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나 추진 방식의 급진성과 무원칙은 곳곳에서 저항 요인들을 양산해 놓았다.

그러나 발상을 바꿔보면 지금이야 말로 햇볕정책이 거듭 나고, 역사 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햇볕정책은 어차피 현정권 하에서 완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정일 답방이 이루어지고 통일헌법을 만든다고 해서 끝날 일도 아니다. 남북 간에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이루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현정부의 햇볕정책은 이쯤서 ‘승계와 단절’의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들을 어떻게 수정하고 무엇을 다음 정권에 넘겨줄 것인지를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그것은 역사의 한 단막극으로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

이 작업에는 계기가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사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햇볕정책을 입안 추진해 온 그가 정리의 주체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

기독교도인 임 장관에게는 ‘햇볕정책의 전도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자신도 그 역할을 자임해 왔다. 그가 진정 햇볕정책의 ‘전도사’라면 이제 ‘순교’를 생각할 때다. 스스로 장관직을 사임함으로써 햇볕정책을 거듭 나게 하고, 자신에 대한 평가도 역사의 흐름 속에 맡겨야 한다. 임 장관이 국내 정치의 제물이 되어 순교의 시기마저 잃어버리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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