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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추억] 썩은 고목에 목숨바친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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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chosun
등록일
2006-01-19 17:12:25
조회수
21203
김명석(가명) 전 노동당 간부

수령독재로 유지되는 북한에는 민주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희한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화재현장에서 수령의 초상화부터 구해야 하고, 뒤집힌 배에서 수령의 초상화를 비닐에 싸서 가슴에 품고 죽은 선원은 영웅이 된다.

수령은 동상, 사진, 심지어 고목나무에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북한에서 노동당 산하기관에 근무할 때 있었던 웃지 못할 일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북한에는 「구호나무」라는 것이 있다. 구호나무는 일제시대 때 김일성이 인솔하는 항일유격대(발치산)가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을 칭송하는 문구(구호)를 나무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호나무는 죽은 나무이거나 고목들이다.

하지만 수령우상화와 김정일의 후계자 구축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살아있는 나무도 구호나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50년 전에 조각하듯 칼로 새긴 글자인데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있을까?』 무슨 시약을 동원해서 밝혀냈다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구호나무가 전국적으로 수천 그루가 나오게 된 것이다.

북한당국은 인민들을 총동원해 이 구호나무를 관람시켰는데 그 반응이 아주 묘했다.

나무도 자라면서 세포분열을 하는데 글자는 어떻게 원형 그대로 남아있을까? 삼척동자도 믿지 못할 구호나무에 사람들은 쓴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구호나무에 새겨졌다는 글자들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에 백두광명성이 솟았다』 (여기서 광명성은 김정일을 뜻한다), 『백두광명성 만만세』 『백의동포여, 조선의 대를 이어줄 백두광명성이 솟았다』, 『3대장군(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만만세』 등등이다.

수백 개의 고목에 새겨진 구호나무는 해외에서 수입한 2만 달러짜리 특수유리관에 영구 보관되고 살아있는 나무들은 보호대를 설치하고 주변을 각종 장식물로 치장했다.

이 구호나무를 훼손하는 것은 수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과 똑같은 중범죄로 간주해 엄벌에 처했다.

1997년 8월경 평북 신의주 지방에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났는데 구호나무들이 대거 물에 휩쓸렸다. 市당국은 물에 휩쓸린 주민들을 구하는 것보다 구호나무를 건져내는데 진력했다. .

그리고 건져낸 구호나무들은 도(道)에서 가장 큰 목욕탕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그곳에서 말리도록 지시를 내렸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밤낮으로 그 목욕탕을 지키며 나무 말리기에 여념이 없던 보일러공들과 노동자들이 밤에 술을 먹고 관리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구호나무에 불이 붙어 모두 타버린 것이다. 즉시 비상소집이 걸렸고 노동자 7명은 족쇄(수갑)를 채워 국가안전보위부에 연행됐다. 물론 김정일에게도 이 사실이 직보됐다.

간부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저마다 목청을 높였지만 김정일은 홍수와 굶주림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이들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며칠 후 평북도당 간부들은 광장에 주민들을 불러내 이 사건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했다.

주민들은 다들 이들에게 틀림없이 극형이 내려지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장군님(김정일)의 친필지시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죽는 줄만 알았던 이들 「죄수」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장군님의 「은덕」을 칭송했고, 군중들도 장군님의 「은혜」에 감동했다.

이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98년 3월 구호나무와 연관된 사건이 또 벌어졌다.

함경남도 지방에 있는 무재봉에서 대형 산불이 일어났다. 배고픈 주민들이 뙈기밭을 일구다가 실수로 산불을 낸 것이다.

이 산에 구호나무들이 많이 있었고 인근엔 군부대들이 배치돼 있었다. 산불이 워낙 크게 나 바위가 불에 그슬려 탁탁 튈 정도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한다. 구호나무를 구하기 위해 군인들이 동원됐고 20명의 군인들이 구호나무 곁에서 불을 끄다 질식해 쓰러졌다. 그중 17명은 끝내 사망했다.

인민무력부는 이 사실을 즉시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일은 『참 훌륭한 군인들』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봐 군인들은 이처럼 영웅적인데 얼마 전에 술 처먹고 구호나무를 태워버린 사민(민간인)놈들 있지?』하며 그들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사람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북한에서 살려준 줄 알고 눈물을 흘린 민간인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껴버렸다. 며칠 뒤 구호나무를 태워먹은 민간인들은 다시 보위부에 연행돼 종적을 감추었다.

노동신문은 7년이 지난 작년 12월 22일 무재봉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사망한 군인들은 영웅 칭호를 받았고, 살아남은 군인들은 특별히 중국에서 성형수술을 받는 기회를 누렸다.

화재나 재난이 발생하면 인간의 생명부터 먼저 챙기는 민주사회와 달리 수령의 초상화나 고목나무에 목메는 북한주민들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쓸데없이 목숨을 버린 군인들과 인민들의 넋을 멀리서나마 기리고 싶다. 더이상 수령 우상화의 희생물이 되어 귀한 목숨을 버리는 일이 없어졌으면 한다.
작성일:2006-01-19 17:12:25 203.255.11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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