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 「노동자 계급 앞장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 앞당기자」 「역사의 자취를 목격했습니다」. 「평양 통일축전」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 일부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참관 방명록에 썼다는 이들 글귀는 수많은 국민들에게 심한 허탈감과 함께 격심한 통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통일운동」에 전념해 왔다는 민간통일세력들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마저 갖게 한다.

우리가 북한과의 공존 내지 평화를 유지하려는 기본 뜻은 하나의 체제가 다른 체제를 압도하는 방식보다는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선에서 북의 주민을 돕고 북의 경제에 도움을 주는 현실적인 접근방식에 있다. 이 정부의 햇볕정책도 그런 국민적 공감대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국민적 공감대와 컨센서스의 선을 넘어 북의 체제를 찬양하고 「만경대정신」이니 「노동자계급」 운운하면서, 때로 북한보다 더 북한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 남쪽의 가치전도적 경향과 분위기를 우리는 언제까지 용납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 일부 「통일분자」들의 일탈에 대해 남쪽 사회는 오랜 분단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파생할 수 있는 「돌출」일 수도 있다고 이해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또 크게 보면 일부의 과잉이 여타의 부족을 메워주는 효과도 있으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평양에서 있었던 사태는 이제 우리 대다수 국민으로 하여금 이들의 의도된 일탈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남한 사회의 분열을 극대화하려는 북한당국의 「통일전선 노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이런 상황을 초래하게끔 통제력을 잃었거나 어쩌면 이런 사태를 예견했으면서도 편리하개 외면한 우리 당국의 안이한 대북인식이 위험수준에 이르렀음을 감지케 한다.

이 모든 것이 북과의 관계개선 내지 김정일 답방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생각에 편승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정부는 이제 잠시 뒤로 한발 물러서 우리가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깊이 성찰할 때가 됐다. 김 대통령은 이쯤에서 자신의 대북정책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을 가다듬고 그것을 국민 앞에 밝혀 일부 민간단체들의 고삐 풀린 경거망동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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