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군 1호기의 평양 출현은 한반도 발(발) 충격파였다. 2000년 6월13일 오전 10시38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비행장 땅에 발을 딛고 김정일(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덮쳐오는 파도와 같은 흥분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김 대통령은 평양에서 “평생 소원을 이뤘다”고 말했다. 30년 전에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를 꿈꿨던 한 정치인의 숙원이 이뤄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로 그 꿈으로 인해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그가, 이날 비행기 출입문 앞에 나와 평양의 공기를 호흡하고 그 산하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회는 실로 벅찼을 것이다. 전쟁과 냉전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온 이 땅의 사람들 모두가 김 대통령과 그 감회를 함께했다.

오늘 우리는 역사의 한 모퉁이를 돌았다. 한반도에 전혀 새로운 국면을 트고, 이 땅의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관을 여는 큰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흥분’과 ‘격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날 김 대통령이 넘어간 군사분계선 양쪽엔 100만명 이상의 중무장 병력이 대치하고 있고, 평양 순안 비행장의 북한 군악대가 연주한 곡은 ‘제국주의를 쳐부수자’는 ‘용진가’(용진가)였다.

남과 북의 이해가 합치하는 부분은 조그마한 실마리 정도에 불과하고, 지난 시기 어느 한 쪽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한(한)은 며칠간의 격정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만큼 깊다. 복잡한 주변 4강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김 대통령은 서울 공항을 출발하기 앞서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갖고 평양으로 간다”고 말했다. 역사와 온 국민이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김 대통령에게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

/양상훈 정치부 차장 jhy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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