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철(최인철·72·무직), 현동화(현동화·68)씨는 같은 반공포로지만, 2000년 6월 현재 인도에서 본 모습은 정반대였다. 최씨에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반면 현씨는 1남1녀를 한국에 역(역) 유학 보냈다. 현씨는 또 2000여 교민을 대표하는 인도 한인회장이며, 여행사와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씨는 한국전쟁과 함께 고향과, 부모 형제 자매 아내 딸 친구들과 헤어졌고,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동거하는 티베트 출신 여인이 전부다. 1928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후 아버지가 도(도)간부를 지내고 인민빵공장을 운영해 유복하게 자랐다. 사진촬영을 좋아했고, 인민군에 의해 사진병으로 차출됐고 카메라 들고 참전한 한국전쟁에서 국군포로가 됐다.

“수용소에서 고향 일가친척이 죄다 몰살됐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듣고는 이 한스러운 한반도땅을 벗어나겠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

미련없이 인도행 배를 탔고 인도에 주저앉아 거의 반세기 삶을 보내고 말았다. 고향에 두고온 처자식에 대한 죄스러움을 평생 떨쳐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인도 정부로부터 받는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생활을 겨우 꾸려나간다. “가봐야 만날 사람도 없다”며, 통일이 돼도 고향을 찾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최씨와 대비되는 현씨는 함북 청진 출신. 해방후 38선 이북인 강원도 금화군(현 철원군)에 정착했다. 여관을 운영해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1949년 평양사동군관학교에 입학, 인민군 장교가 된 뒤 1950년 10월말 화천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 생활을 거친 뒤, 남·북한을 모두 거부하고 인도로 갔다. “당시 남한을 포기한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라 워낙 가난한 상태라 외국에 나가 제대로 공부해 커보겠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

1960년대 무역업을 시작한 현씨는 순조롭게 사업이 전개돼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남은 여생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도 통천과 가까운 속초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뉴델리=함영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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