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정치부장

노무현 정부 첫 주미대사였던 한승주 전 외교부장관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주파가 승리해 우리 외교가 달라진 것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인 당선자 시절이었다. 노 당선자는 자신의 대외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고위 특사단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그 특사단이 출국 인사차 노 당선자를 찾았다. 그 자리에서 노 당선자는 “TV 봤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진보 시각의 다큐멘터리로 그 며칠 전에 방영된 것이었다.

그 방송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노 당선자는 “미국에 가기 전에 한번 봐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 한 참석자의 기억이다.

그는 “나도 그 프로그램 테이프를 즉시 구했다. 앞으로 나라를 5년간 이끌고 갈 지도자가 강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다면 그게 무엇인지 만사 제치고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테이프를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내용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 발발을 단순화해서 폭로물처럼 다룬 내용이었다.

대중 매체에서 그런 내용을 방영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대통령 당선자가 거기에 감명받고 고위 대미 외교를 위해 떠나는 특사단에까지 말을 한 것은 충격이었다.

나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걱정은 불행하게도 지난 3년 반 동안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그 TV 프로그램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었다.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은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 있다. 전쟁이냐, 평화냐를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전시 작전권 문제에 관심을 보이더니 취임하자마자 “전쟁이 나도 한국 대통령에겐 지휘권도 없다”는 말을 하면서 국방부에 전시 작전권 환수 계획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남북이 위험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대한 군사적 변동 문제가 갑자기 물 위로 올라와 시끄럽게 굴러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 후 노 대통령은 친노 신문 인터뷰, 친노 인터넷 인터뷰, 민주항쟁 관계자 면담, 군부대 특강, 각종 사관학교 졸업식, 군 주요지휘관 회의, 각종 경축사, 각종 회견 등을 통해 계속 전시 작전권 얘기를 공개적으로 했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면 우리 국민에게 잘 먹힌다. 노 대통령이 일본을 비난하면 지지도가 올라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에 넘어간 전시 작전권을 되찾아 와서 자주 국방을 한다’는 것도 언뜻 멋지게 들린다.

문제는 그 시기다. 갑자기 수년 내에 우리가 안보상의 일대 실험을 해야 할 절박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노 대통령의 첫 국방보좌관이었던 김희상 예비역 중장은 “북한이 없애고 싶어하는 첫 번째가 한미연합사”라고 했다. 전시작전권이 환수되면 한미연합사는 실질적으로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지금 왜 우리가 나서서 한미연합사를 없애는 일에 안달복달해야 하는지, 그것도 끊임없이 동맹국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노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환수 얘기를 하면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작전권을 갖고 우리 장수들을 데려다 볼기를 쳤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미국의 정치적 카드가 되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다.

마침내 이제 미국 쪽에서 “동맹 간에 이견을 비공개 협상장이 아니라 신문 제목으로 터뜨리느냐”(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말이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일 여당 지도부에 “당 지도부가 인사 문제에서 두 번이나 포화를 쏘듯이 언론에 해댄 것은 문제가 있다. 섭섭하다. 우리 한마디 한마디가 갈등으로 비쳐서 부자유스럽다. 서로 이견이 있어도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얘기는 노 대통령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이다. 장관 인사보다 훨씬 중요한 국가 안위가 걸려 있는 문제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