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통권 단독행사·한미연합사 해체 이후엔 어떻게…
증원군 10만명, 그나마 불확실한 약속
北 급변사태때 美 독자작전 가능성도


◆북한 급변사태 시

북한에서 쿠데타 등이 터졌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미국은 주한미군사령부를 통해 비상사태를 선포한뒤 한국군 사령부에 정보를 통보했다. 한국 당국은 이때서야 북한 사태에 확신을 갖게 됐다. 각종 정보수집 장비 열세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정권은 위기를 만들어 사태를 돌파하기로 하고 서해 5도에 국지 도발을 감행했다. 한국군은 독자적인 해·공군 전력으로 저지에 나서는 한편 미 항공모함 전단(戰團) 등의 투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미 연합사 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미 증원 전력 투입 결정이 늦어졌다. 미군 일각에선 “왜 우리가 한국군의 작전통제를 받아야 하느냐”며 반발하는 기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한국군에 통보하지 않은 채 특수부대를 북한에 투입하고 정밀 폭격에 나서는 등 독자적인 작전을 펴기도 했다. 한국군이 항의하자 미군측은 “한국측에 알려줘야 할 의무가 없다”고 반박했다. 미 증원병력은 북한 급변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곧바로 철수했다.

◆북 전면전 도발 시

미국 정찰위성 KH-12와 U-2 정찰기에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잡혔다. 미국 정보는 즉각 한국군에 전해지지 않아 애를 먹였다. 독립 사령부를 유지하던 양국군은 ‘전시 작전기획 협조단’을 가동했다. 유사시 한국 주도 작전을 미군이 지원하는 채널이었다.

하루 뒤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시작했다. 우리 군은 저지에 나섰고, 작통권 단독 행사 후 새로 마련한 작전계획에 따라 미군도 F-117 스텔스 전폭기 등을 투입, 북한 내 전략 목표물들을 족집게 공격했다.

북한군은 초반 기세를 몰아 서울 북방 10여㎞까지 남진하며 수도권을 위협했다. 미 증원군이 필요했다. 연합사 체제에선 자동적으로 미 증원군이 투입되지만, 이젠 우리 군이 미군에 사안별로 요청해야 할 경우가 많았다.

증원군 규모는 이전(69만명)보다 크게 줄어든 10만여명이었다. 그나마 지상군 병력은 얼마되지 않았다. 작통권 단독 행사 이전에는 작계(作計) 5027에 따라 통일을 염두에 뒀으나 새 계획은 우리 군 주도로 이뤄져 남침 격퇴에 주안점을 뒀기 때문이다.

결국 지상전은 사실상 전적으로 우리 군 몫이었다. 더구나 연합사 해체 뒤 작전 협조·지원 시스템에 종종 ‘구멍’이 났다. 미국은 특히 작계 5027의 경우 대규모 미 지상군 투입에 따른 미군의 인명피해를 우려해 적극적인 해·공군 지원을 했으나 연합사 해체 후엔 약속한 해·공군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 군의 필사적인 반격으로 휴전선 이북 10~20㎞ 지역까지 북한군을 밀어올리는 데 성공했으나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재래식 무기를 앞세운 북한군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북한은 전후방 가릴 것 없이 폐허가 돼버렸다. 한·미 양국 내에선 장기 소모전에 따른 ‘종전(終戰)’ 목소리가 커졌고 북한군 수뇌부도 남침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 휴전을 모색했다./유용원 군사전문기자 bemi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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