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외국순방 秘話’ 中서 출판
90년 “韓中 관계개선” 통보에 김일성 충격
97년 홍콩반환 최후의 1초까지 英과 신경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1년 9월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게 자신이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訪北)에 답방하지 않은 것은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당선으로 국제정세가 변해 답방 효과에 대한 예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30일 중국에서 출판된 ‘더 아름다운 세계를 위해: 장쩌민 방문외교 실록’은 2001년 9월 3~4일 국가 주석으로서 두번째 방북한 장쩌민에게 김정일이 “남쪽으로 내려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남쪽으로 가면 세계에 한반도 문제는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대선 이후 국제정세가 변했다. 실제 방문 효과가 어떨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 발언 시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한 지 1년3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이 실록은 1990~2002년 사이 장쩌민 주석 재직 기간 중의 해외 순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중국 외교부의 전직 외교관들이 ‘중즈청(鍾之成)’이란 필명으로 공동 저술했다.

이 실록은 또 한·중 수교(1992년 8월 24일)를 앞두고, 양국 최고위층이 나눈 대화도 소개했다. 1990년 3월 14일 오후, 주석 취임 이후 북한을 첫 방문한 장쩌민(江澤民)은 “중국과 한국이 서로 무역대표처를 설치하는 일은 아무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다”고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김일성의 반응은 6개월이나 지나서야 나왔다.

같은 해 9월 방중(訪中)한 김일성은 장쩌민에게 “만약 당신들이 남조선에 무역대표처를 설치해야 할 필요를 확실히 느낀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6개월 시차를 둔 김일성의 반응은 당시 북한이 한·중 관계 개선을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한·중 수교 후 8년이 지난 2000년 5월 중국을 방문했다. 그는 방중에 앞서 주(駐)북한 중국대사를 불러 “중·한 수교는 중국 공산당이 결정한 일이고 조선은 0.001%의 의견도 없다”며 양측 고위급 상호방문을 회복하길 밝혔다고 한다. 그런 뒤 2000년 5월 중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기 전에 먼저 장쩌민 동지를 한번 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장쩌민이 방한(訪韓)한 것은 1995년 11월 13일이었다. 장쩌민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을 방문한 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원들에게 한국의 발전상을 목격한 감동을 털어놓았다.

“한국은 땅이 작고 인구는 많으며, 자원이 부족하다. 그런데 30년이란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런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나. 그 원인이 무엇이며 우리가 거울로 삼아야 할 경험은 무엇인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은 또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당시 중국과 영국 양측이 벌였던 신경전을 소개했다. 영국측은 홍콩을 최후의 1초까지 유지하기 위해 6월 30일 밤 12시 정각에 영국 국가(國歌) 연주를 마치고, 7월 1일 0시1초부터 중국 국가를 연주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 군악대 지휘자는 밤 11시59분 58초에 지휘봉을 치켜들어, 7월 1일 0시 정각에 국가가 연주되도록 했다.

1993년 장쩌민의 첫 방미(訪美)에선 악기가 회담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매개체가 됐다. 장쩌민은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에게 중국산 색소폰을 선물로 꺼내놓으며 회담을 시작했다. 클린턴이 회담을 마치며 “기회가 있으면 당신에게 (색소폰을) 연주해주겠다”고 하자, 장쩌민은 “그렇다면 나는 얼후(二胡·중국 전통악기)로 당신 연주에 맞추겠다”고 화답했다고 한다./베이징=조중식특파원 jsc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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