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강경드라이브-韓 상황관리 주력
9월 한미 정상회담 고비될 듯


북한의 태도변화를 기대했던 말레이시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별 의미없이 끝난 뒤 한미 양국이 대북 정책의 방향을 놓고 미묘한 시각차를 노출하고 있다.

’명분을 축적했으니 이제부터 밀어붙이자’는 미국 조야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더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하는게 중요하다’는 한국의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북한 옥죄는 미국= ’금융’이라는 북한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은 8월 외교가의 하한기를 맞이해 마찰음이 많이 나는 정책은 가급적 자제하면서도 급소만은 집중 공략하려는 기세다.

특히 말레이시아에서 10자회동까지 열어 ’고립된 북한’의 모습을 제대로 연출한 만큼 대북 금융제재에 대한 명분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감추지 않고 있다.

우선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조사로 북한 수뇌부의 ’회계장부’를 압박하고 있는 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차관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

그는 30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최고위층에서 상당한 양의 불법자금을 전 세계 은행에 숨겨놓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미국은 금융기관들이 북한 관련 계좌를 방치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신중하게 계산하기를 권한다”고 밝혔다.

이미 한국과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를 순방하며 대북 금융제재에 대한 실무적 조사를 매듭지은 것으로 알려진 레비 차관보가 공개적으로 북한 수뇌부에 대한 공세를 과시하는 것은 그만큼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은 ’국제 금융시스템의 보호’라는 목적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불법행위’와 연관있는 각국의 기업및 개인의 신상을 밝히는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리스트에 포함된 법인들은 미국법에 의한 제재 뿐 아니라 국제 금융계의 규제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은 금융제재 외에도 클린턴 정부 시절 해제했던 경제제재 등도 조만간 복원할 계획이다.

복원될 조치에는 북한으로의 투자 및 송금과 출입국, 무역 등 과거 풀어줬던 것이 망라돼 있다.

ARF에서 북한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정서’를 드러냈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ARF 직후 필리핀을 방문, “북한은 스스로 고립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며 “북한이 원하는 바라면 우리는 북한을 기꺼이 고립시킬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ARF 직전에는 “북한은 이런 더러운 불법행동, 특히 미 달러화 위조를 그만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미국내에서 대표적인 협상론자로 알려진 힐 차관보의 발언은 향후 미국의 대북 정책이 대화보다는 압박에 무게가 실릴 것임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 관리’에 주력하는 한국= ARF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한국 당국자들은 “8월 한달 상황을 잘 관리한 뒤 9월 이후 정세 돌파를 시도해보자”는 얘기를 많이 했다.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유엔 안보리 결의, 그리고 ARF 등 숨가쁘게 진행돼온 북한 외교전이 일단락된 만큼 8월 하한기에는 ’숨을 고른 뒤’ 새로운 기회가 오면 이를 돌파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강경 입장과 북한의 고집 등을 감안할 때 협상국면으로의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당국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위험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중동사태, 미국내에서 북한과의 직접협상을 요구하는 민주당을 비롯한 부시 반대진영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는 점,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 정가의 일정 등을 감안할 때 시간이 가면 현재의 대치국면이 완화될 기회가 충분히 올 수 있다는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8월은 일단 정세 관리에 주력하고 9-10월에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는게 바람직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정부는 미국의 대북 정책 뿐 아니라 흐트러진 남북관계의 정상화도 주요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관련, 8월의 중요행사인 8.15 경축사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어떤 복안을 풀어놓을 지 관심사가 되고 있다.

또 9월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담판’이 이뤄질 지도 외교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일각에서 지난 6월 추진되다 연기된 김대중(金大中) 전대통령의 방북 재추진이나 또다른 대북 특사의 파견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9월 이후 정부의 ’상황 돌파’ 구상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이전인 8월21일부터 9월1일까지 북한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한미 합동 지휘소 훈련인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이 예정돼 있다. 여기에 남북의 민간이 참여해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8.15 민족대축전 문제에 북한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도 변수가 될 전망이다.

결국 8월 한달간 정부의 정세 관리노력이 어떤 결실을 가져오느냐, 그리고 9월 이후 펼쳐질 새로운 외교전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지 여부가 복잡하게 얽힌 북한 외교방정식의 해법 도출에 관건이 될 전망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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