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

“만일 어떤 침략자들이 사회주의 내 조국을 0.001㎜라도 침범한다면 쌓이고 쌓인 민족적 분노를 총 폭발시켜 이 땅에서 영영 쓸어버릴 것이다.”“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하는 최근 노동신문의 논설과 흥선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斥和碑)의 비문은 마치 동전의 양면을 보는 듯하다.

대원군 치세의 조선과 냉전 종식 후 북한은 개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거슬러 고립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너무도 닮은꼴이다. “서양배(輩)의 포연이 천하를 뒤덮어도, 동방(東方)의 찬란한 광채는 영원토록 빛나누나.”

미국과의 싸움에서 거둔 승리를 자축한 대원군의 시구(詩句)와 미국에 맞서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를 불사하는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를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간섭으로부터 자주권을 지키고 강성번영을 이루게 하는 가장 위력한 정치방식”으로 예찬한 노동신문의 논설에 짙게 밴 자주와 자대(自大)의식도 유사하다.

이것만이 아니다. 대원군과 김정일은 정권 유지를 위한 사상통제와 우민화 정책, 그리고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내세우는 점까지 쌍둥이 같다.

이처럼 대원군과 김정일을 견주다 보면, “은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 시대인 하나라에 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는 옛 경구가 떠오른다.

은의 주(紂)왕이 하의 걸(桀)왕의 폭정을 거울로 삼았다면 폭군의 욕된 이름을 뒤집어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대원군의 치세를 거울로 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집권을 도운 집권세력의 이익에 반(反)하는 어떠한 개혁도 하지 못한 대원군처럼 자신을 옹립한 군부의 이해를 해치는 어떤 정책도 추진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이미 수명을 다한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지키는 데 급급했던 대원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시대의 뒤안길로 접어든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대원군이 사상통일을 이유로 처형한 8000여명의 천주교도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김정일 정권의 반체제 인사들, 그리고 두 정권 아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간도와 연해주로 건너간 수많은 ‘월경민(越境民)’과 ‘탈북자(脫北者)’의 존재는 그들의 도덕적 결함과 정책의 실패를 웅변한다.

그러나 대원군에 대해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를 지켰다”는 칭송과 “망국(亡國)의 단초를 열었다”는 악평이 엇갈리듯, 김정일에 대해서도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고 가는 무뇌아(無腦兒)”라는 손가락질과 “민족자주권을 지키는 지도자”라는 찬탄이 맞부딪친다.

무엇이 옳은 평가일까? 대원군 시절 중국과 일본은 양무운동(洋務運動)과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서구를 배우는 데 여념이 없었고, 김정일과 같은 시기에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고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탈바꿈한 것에 견주어 보면, 시대의 흐름을 거부한 두 사람은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백성이 아니라 왕조를 지키기 위해 서구 열강과 무력대결을 불사한 대원군처럼 김정일 역시 인민이 아니라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핵 보유와 미사일 시험발사에 집착할 듯하다.

그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나 동독의 호네커처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국가반역죄로 재판정에 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대(對)북한 봉쇄를 규정한 유엔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중국과 러시아는 더 이상 북한의 우군이 아니다. 그의 눈에는 원폭과 이를 탑재할 장거리 미사일의 보유만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서 체제 유지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일 뿐이다.

“대원군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나라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던 김옥균의 바람은 끝내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망국(亡國)이었듯이, 김정일이 개방과 개혁을 계속 거부한다면 북한의 앞날도 불을 보듯 뻔하다.

실패의 역사에서 미래의 교훈을 찾는 ‘징전비후(懲前毖後)’의 안목과 전략에 목마른 오늘, 대원군 시대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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