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북한을 6자회담 틀로 유도하려는 관련국들의 노력이 결국 무산됨에 따라 각국은 저마다 회담 성과를 결산하는데 분주한 모습이다.

ARF를 계기로 6자회담 참가국 외교장관 회동을 제안한 미국은 북한이 이 제안마저 수용하지 않음에 따라 향후 북한에 대한 제재를 본격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반면 북한의 고립상태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북 제재 명분 축적한 미국 = 애초 북한이 불참할 경우에 대비해 5자회동을 준비했던 미국은 중국이 반대함에 따라 결국 한.미.중.러.일 등 6자회담 참가 5개국에 호주.뉴질랜드.캐나다.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이 두루 참여하는 10자 외교장관 회동을 28일 성사시켰다.

이 자리에는 5자 회동에 반대하던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까지 동참함에 따라 미국은 10자 회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북한으로서는 ARF라는 별도 행사를 계기로 6자회담 당사국 관계자들과 함께 쿠알라룸푸르에 체류하면서도 회동에 참석하지 않아 고립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인상을 주게 됐다.

미 행정부 강경파들로서는 북한의 이 같은 태도가 대북 압박의 명분을 축적하는 호재로 작용했다고 자평할 만한 상황이다.

미국이 대북 강경기조 속에 유일한 출구로 열어놓은 6자회담 제안을 북한이 또 한번 외면한 만큼 대북 강공 드라이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일축할 명분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존 볼턴 주 유엔 미국대사는 27일 “ARF 회의 참석 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방문중인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현지에서 북한문제를 충분히 상의하고 귀국하면 우리가 취할 다음 (대북) 조치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예사롭지 않다.

아세안 회의가 열리고 있는 26일 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부 차관이 “북한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WMD) 거래 연루 기업에 대해서는 모든 유엔 회원국들이 미국처럼 자국내 자산동결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데서 보듯 미국은 이미 대북 제재의 수위를 높여갈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고립 택한 북한 = 북한으로서는 미사일 발사 이후 국제사회의 압박을 피할 길이 될 수 있는 6자회담 관련 행사에 불참함으로써 고립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북한이 이번 ARF에 백남순 외무상을 예정대로 참석시키기로 했을 때 국제사회는 한가닥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

북한이 이달 15일 유엔 안보리 결의문 채택 이후 처음 다자 국제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만큼 어떤 제스처를 보일 것인지가 관심을 모았다.

미사일 카드를 한 번 사용한 북한이 ARF를 계기로 ‘슬며시’ 6자 외교장관 회동에 나와 미사일 이후 험악해진 대북 제재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바꾸는 데 모종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결국 미국이 직접 초청한 6자 회동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금융제재를 풀지 않는 한 6자회담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자기 입장을 선명화하는 쪽을 택했다.

북측 대변인 격인 외무성 정성일 국제기구 부국장은 28일 쿠알라룸푸르 니코 호텔에서 북중 양자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기 전 “미국이 금융제재를 풀지 않는 한 6자가 모인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북중 양자 회담에서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10자 회동의 약속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1시간30여분간 회담을 가졌지만 북한의 강고한 입장을 바꾸는데 실패했다.

중국이 결국 10자회동에 참가하는 쪽을 택함에 따라 북한으로서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강경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중국과도 당분간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대북 영향력 축소 속 압박-대화 사이 균형잡기 노력 = 우리 정부는 이번 ARF를 계기로 미국.일본 중심의 대북 강경기조 속에 대화의 틀은 절대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데 주력했다.

‘압박’과 ‘대화’ 사이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28일 열린 10자 회동에서 ‘두 가지의 접근방법’을 언급하면서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해 국제사회가 단합된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대화의 틀을 복원하고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문 채택 국면에서 중국과 함께 유엔 헌장 제7장 채택에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도 결의문 채택 후에는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보였던 우리 정부의 ‘균형잡기’ 입장이 이번 회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번 ARF 관련 회동에서 꾸준히 대화틀 회복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번 쿠알라룸푸르 회동의 무게추가 ‘대북 압박’과 ‘대화 회복’ 중 후자 쪽으로 기우는데 일정부분 조력했다고 볼 수 있다.

대북 결의문 채택에 앞장섰던 일본 조차도 10자 회동에서 “압박은 수단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 일본으로서는 대화의 창을 닫지 않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언급한 데서 보듯 이번 회동에서는 대북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이번에 남북 외교장관 회담을 추진했지만 북한이 회담 마지막날인 28일까지 이에 응하지 않음에 따라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 식량.비료 지원 논의를 중단한 것을 계기로 우리가 대북 지렛대를 적지 않게 상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반 장관은 2004~2005년 잇달아 ARF를 계기로 백 외무상과 회담을 갖고 북핵 관련 대화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지만 이번에는 ARF 회의 전날인 27일 말레이시아 총리를 예방하는 기회에 백외무상과 짧게 만나 몇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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