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차관이 26일 인터뷰에서 밝힌 핵심 내용은 미국이 지난해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혐의 기업으로 지정한 11개 북한 회사에 대해선 한국을 포함해 모든 유엔 회원국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거래금지와 자산동결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치 차관은 또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에 대한 조사 결과 이 은행 고객중 단천은행이 WMD 확산에 관계있는 업체임이 밝혀졌다고 말함으로써, 설사 북한이 위폐나 마약 등의 불법활동을 중단하더라도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한 대북 금융제재를 해제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북한이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금융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것과 관련, 미국 정부 스스로 양보할 퇴로를 끊어버린 셈이다.

이와 함께 레비 차관은 이날 연합뉴스와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의 최근 아시아 순방, 특히 한국 방문을 둘러싼 각종 추측과 관측을 정리한 것도 중요하다.

그는 특히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사업의 중단을 한국 정부측에 요구하거나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았음을 거듭 강조했고, 일각에서 보도된 ‘BDA 계좌를 통한 김대중(金大中) 정부 때의 대북송금 추적’에 대한 확인 질문에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나는 언론에 보도된 것에 관해 인터뷰해서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보도들에 대해 레비 차관 옆에서 함께 전화 인터뷰를 한 몰리 밀러와이즈 대변인은 “언론의 과잉보도와 부정확한 보도가 많다”고 거들었다.

◇북한 회사 11개 제재 요구 = 당초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에 따른 후속조치 협의 과정에서 한·미간 이견과 갈등 요인으로 관측됐던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해 레비 차관이 현 시점에서 특별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후속조치를 둘러싼 한·미 정부간 입장차이로 인한 갈등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레비 차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지난해 6월과 10월 각각 3개와 8개 북한 회사들에 대해 부시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통해 거래금지와 자산동결을 내린 사실을 상기하면서 “다른 나라들도...최소한” 이 11개 회사에 대해선 미국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레비 차관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안보리 결의 이행 방안을 ‘일반론적으로만’ 얘기했다고 말했고, 이날 한국 정부 관계자도 “일반적인 얘기만 했지, 북한 기업 11개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비 차관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최소한’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며 “북한의 미사일과 WMD 프로그램에 공개적으로(openly) 관계된” 이 회사들에 대해선 다른 나라들도 미국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일반론’ 속에 든 함의를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추진하는 안보리 결의의 후속조치의 범위를 알아보기 위해 ’북한에 들어가는 돈은 어떤 것이든 WMD로 갈 수 있다는 일부의 주장에 동의하느냐’고 물은 데 대해선 “동맹들과 결의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놓고 논의중”이라고 말했다.

또 ’안보리 결의는 북한과 합법적 거래도 막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엔 “이론적 관점에서 좋은 질문이고, 일상적인 무역거래에 의한 수익도 WMD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면서도 그런 조치를 할 수 있기 위해선 “먼 길을 가야” 하므로 “우선 단기적으론, WMD 연루가 공개된 회사들을 차단해야 한다”고 다시 11개 북한 회사의 존재를 강조했다.

현 단계에서 정상적인 대북 거래마저 차단하려는 정책은 비현실적이라는 인식하에 미국이 “역사적인” 결의라고 평가하는 안보리의 대북 결의에 의지해 북한의 11개 회사에 대해서만이라도 다자제재를 실현시키는 목표를 세운 셈이다.

◇북한 11개 회사에 대한 미국의 조치는 = 지난해 6월 조선광업무역회사, 조선련봉총회사(련각산수출조합), 단천상업은행(조선창광신용은행) 등 3개사, 10월 조선해성무역, 조선종합설비수입, 조선국제화학합작, 조선광성무역, 조선부강무역, 조선영광무역, 조선연화기계합작, 토성기술무역 등 8개사에 대해 거래를 금지하고 자산을 동결했다.

자산동결은 특히 이들 회사가 “현재 미국내에 갖고 있거나, 앞으로 가질 모든 자산”이라고 해서 미래 가능성까지 대상으로 했다.

또, 이 회사들의 자산 뿐 아니라, 이들 회사와 거래가 있는 모든 미국 내외의 기업의 자산과 미국내 기업활동에 대해서도 이 행정명령이 작용하도록 함으로써 빈틈을 남기지 않았다.

조선광업의 경우 ’재래식 무기 및 탄도미사일 관련 장비의 주요 수출기관’이라는 혐의이며, 조선련봉은 ’북한의 군수거래 지원’ 혐의, 단천상업은행은 ’재래식 무기, 탄도미사일 등의 제조·조립 관련 물품거래 담당’ 혐의다.

레비 차관은 10월 8개 회사에 대한 조치 발표 때는 “북한 밖으로의 WMD 확산에 연루됐다”고 말해 이회사들이 받는 혐의는 북한의 미사일 등의 기술이나 부품 해외수출 관련임을 시사했다.

해성무역과 토성기술무역은 6월 1차 제재된 조선광업무역회사의 자회사들이고, 나머지 6개회사는 역시 1차 제재된 조선련봉총회사의 자회사들이다.

◇문제는 = 북한과 양자대화나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 5년간 통상 등 모든 면에서 클린턴 행정부 때 만들어지거나 다소 부피가 커진 각종 북미관계를 끊거나 줄여온 부시 행정부와 달리 한국 정부는 대북 화해·협력 원칙에 따라 대북 거래와 협력을 늘려온 입장에서 미국과 같은 조치를 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조치는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자산까지 동결하고, 문제의 회사 자체 뿐 아니라 그 회사와 거래하는 모든 회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제재대상이 된 조선부강무역은 북한의 재벌격인 조선부강회사의 9개 계열사중 하나로 부강제약회사와 함께 주력 계열사다.

부강제약회사가 수출하는 품목중 혈전용해제 ’혈궁불로정’과 암·당뇨 특효약이라고 선전하는 ’금당 주사약’은 지난해 한국에도 시판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부강무역에 대해 미국 정부와 같은 조치를 취할 때, 부강무역이 한국 기업들과 거래가 있다면 그 수익금과 제품은 동결되고, 부강무역과 한국 회사들과 거래도 금지되게 된다.

한국이 미국의 조치를 따를 경우 북한 기업에 대해 상징적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제재가 되는 셈이며, 이에 대한 북한의 반발로 남북관계가 동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미국이 지난 3월 북한의 조선련봉총회사와 거래하면서 북한의 WMD 확산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스위스 ’코하스 AG’의 미국내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 기업에 대해 이 회사와 거래를 금지했을 때, 스위스 연방경제부(SEO)는 자국 언론사에 “코하스가 수출통제 법령을 위반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미국이 제기한 혐의를 부인한 일도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레비 차관이 “최소한도”의 요구로 제시한 북한 기업 11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유사 제재조치 여부를 놓고 한·미간 이견이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워싱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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