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은 북한군 26명이 잠수함을 타고 남한에 침투했을 때 한마디 했다. “모든 당사자들이 더 이상 도발적 행동을 자제해 주기를 촉구한다.

” 한국 정부가 뒤집혔다. “도발은 북한이 했는데 우리더러 자제하라는 말이냐.” 외무부가 항의하자 미 국무부는 물밑으로 “장관이 잠시 착각한 것”이라고 사과했다.

▶키팅 호주 총리가 1993년 APEC회담에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오지 않자 “그는 고집쟁이(recalcitrant)”라고 했다. 마하티르가 발끈했다. “내가 참석하건 말건 호주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말레이시아 집권당은 호주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유학생을 보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공보장관은 무역 보복까지 꺼냈다. 키팅은 2주 만에 유감을 표시했다.

▶외교 언어는 파장도 크고 주워 담기도 어렵다. 외교관들은 정중하고 에둘러가며 격식 갖춘 말을 배운다. 외교관이 ‘yes’라고 하면 ‘perhaps’(아마)를, ‘perhaps’라고 하면 ‘no’를 뜻하고, ‘no’라고 하면 더 이상 외교관이 아니라고 한다.

‘influence’(영향)라는 표현은 ‘pressure’(압력)로 받아들인다. 냉전시대 미·소 협상에서 ‘We will study your proposal’(당신의 제안을 연구하겠다)은 ‘We will bury it’(무시하겠다)라는 뜻이었다.

▶외교관은 회담장에선 티격태격하고도 바깥에선 티를 안 낸다. 2002년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평양을 다녀온 직후 ‘frank’(솔직한) 회담을 했다고 밝혔다. 알고 보니 북한은 켈리에게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갖고 있다”고 했다.

‘frank’는 ‘brutally honest’(야수처럼 숨김 없는)란 뜻이었다는 것이다. 합의할 게 없어도 결렬이라고 하지 않고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거나 ‘합의할 게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둘러대야 하는 게 외교관이다.

▶아테네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외교관의 무기는 전함이나 보병이 아니다. 말과 기회뿐이다”고 했다. 세 치 혀로 전쟁이 나기도 하고, 나랏빚을 갚기도 하는 게 외교 무대다. 이 무대에서 국가원수는 최고 외교관이다.

정상의 외교 언어는 예술 수준으로 다듬어야 한다. 회담 전엔 참모들이 제스처까지 따져 조언한다. 대통령이라면 “외교관은 침묵을 지킬 때에도 그러기 앞서 두 번 생각한다”는 수칙부터 배워야 한다./주용중 · 논설위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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