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회담은 역사적 회담인 만큼 첫 발언은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합니다.” 1971년 9월 첫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열리기 직전 남측은 단단히 별렀다.

휴전협정 후 18년 만의 남북 접촉이어서 기선을 뺏길 수 없다는 각오였다. 인사가 오가자마자 북측 대표가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측 김연주 수석대표도 질세라 원고를 읽었다. 두 대표의 목소리는 1분 넘게 뒤엉켰다. 참다못한 북측 대표가 “김 선생, 김 선생” 불렀다. 김 대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1971년 10월 판문점 적십자사무소. 검은색 크라운 자동차 두 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이 내렸다.

“도로가 이렇게 엉망인데 북 대표단을 어떻게 데려오겠다는 건가?”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통일로가 초고속으로 뚫렸다. 북은 북대로 평양까지 250㎞ 도로를 보수하는 데 100만명을 동원했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번갈아 치르면서 남은 캐딜락을, 북은 벤츠를 수입했다.

▶체제경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 서울을 북 대표단에 선보일 준비가 요란했다. 회담장의 일제(日製) 엘리베이터엔 한국 상표를 붙였다.

저녁엔 빌딩마다 불을 밝히게 했다. 미아리와 신당동 산마루턱 집들은 갑작스러운 페인트칠로 알록달록해졌다. 붐비는 고속도로를 자랑하려고 대한통운엔 화물차 동원령을 내렸다.

북 대표단은 “고속도로라는 데가 이렇게 복잡한 곳이냐”고 물었다.

▶1970년대 초엔 북이 “이산가족들이 서로 아무 곳이나 방문하도록 하자”고 했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북은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1992년 남북고위급 7차회담 때 남측 대표가 건배 제의를 했다. “우리는 하나다.” 북 대표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우리를 흡수 통일하겠다는 소리냐? 용서할 수 없다.” 20년 세월 동안 남과 북의 국력 격차는 그렇게 벌어졌다.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만 12년을 지낸 이병웅씨가 ‘평화의 기(旗)를 들고’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씨는 1971년 첫 남북접촉 때 전략수행원으로 회담에 발을 들인 뒤 외길 33년을 걷는 동안 가슴속에 쌓아둔 얘기들을 풀어냈다.

그는 당초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길어야 3년이면 좋은 결실을 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직도 수백만 이산가족의 한(恨)은 서리서리 맺혀 있다. 그것이 2년 전 은퇴한 이씨의 한이다./주용중·논설위원 midway@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