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前외교, 현정부 외교정책 정면비판

윤영관 서울대 교수는 자신이 노무현 정부의 첫 외교부 장관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현 정부의 대외정책에 말을 아껴 왔다.

24일 한국중등교육협의회 하계 연수 특강에서도 “전직 외교부 장관이라기보다는 국제정치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간과하기 어려운 기로에 서 있다고 판단한 듯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직설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이날 특강엔 전국의 교장들이 참석했다.

윤 전 장관은 외교부장관 1년 만에 정부내 자주파 대 동맹파 갈등 와중에 물러났다. 다음은 윤 전 장관의 특강 요약.

오늘날 한반도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는 중요한 기로에 와 있다. 안보·통상 외교에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한국의 몸은 국제사회에서 30·40대의 성년으로 성장해 버렸는데 우리가 바깥 세상이나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는 의식은 10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력 10위의 국가이면 그에 걸맞은 진취적인 발상이 필요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지금 우리 사회는 구한말에 있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나 1980년대의 종속이론과 같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세계관에 의해 크게 영향받고 있다.

◆소극적 자주

조만간 닥쳐올 한반도 통합의 시대에 대비한 전략적 준비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 대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식의 감정적 민족주의가 우리 시대의 키워드가 돼버린 느낌이다. 과거의 포로, 한(恨)의 포로가 되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과거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발상 자체가 적극적이고,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역사 때문에 가장 감성적으로 호소력 있는 개념 중의 하나가 바로 자주(自主)이다.

탈미친중(脫美親中)을 하나의 전략적 선택으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는 감성이 아니라 차가운 계산으로 해야 한다.

한 달 전 개성 시내에서 북한 동포들의 신장이 우리보다 평균 15㎝ 정도는 작고 골상(骨相)도 달라진 모습을 보고 깊은 비애감을 느꼈다.

미국에 대한 감정에 사로잡혀 외교정책을 밀고 나간다면 북한 동포들의 고통은 더 깊어지고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길도 더 험난해질 것이다.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중국의 6배에 달하는 미국과 그 뒤를 따르는 서방 국가들을 제쳐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은 일인가.

우리는 한·미동맹 속에서 안보와 경제 발전, 민주정치를 실현했다. 지금도 1000여 문의 북한 장사정포가 서울을 겨냥하고 있고 북측 협상 대표들은 심심치 않게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다. 희망사항을 갖고 냉정해야 될 객관적 현실 판단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강대국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우리 국가 목표, 민족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주를 달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 자주를 아무리 많이 구가해도 국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적극적 의미의 자주로서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통일시의 헬무트 콜 총리의 대미 외교다. 콜 총리는 당시 미국 부시 대통령과의 긴밀한 외교를 통해 주변국의 독일 통일에 대한 반대를 막아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적인 적극적인 의미의 자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주다. 독일은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난 다음에 미국에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있다.

◆대북정책의 원칙

남북 협력과 포용정책에서 항상 지침으로 삼아야 될 것이 있다. 80년대 후반 이래 세계사에서 사회주의가 시장경제를 도입해서 자체 전환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 법칙이다.

북한도 이 법칙에서 절대 예외가 될 수 없다. 대북 경협도 북한의 시장경제화를 돕는 일이 돼야 했지만 새 정부는 DJ정부 때와 같은 (원칙 없는) 포용정책을 계속했다. 그 때문에 북한이 큰소리치면서 지원을 받아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인권문제도 비공개적으로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우리의 입장을 수시로 북측에 명확히 전달해야 했다.

그랬더라면 북한이 우리를 지금처럼 우습게 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입지도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원칙 있는 포용정책만이 지속 가능한 포용정책이 될 수 있다.

◆한·미 FTA

80년대 한국의 사회과학계를 풍미했던 이론이 종속이론이었다. 저발전 국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선진국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나는 당시 유학 가서 국제경제학 교과서를 읽던 중 한국이 경제발전의 성공사례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당혹했다.

한국에서는 종속이론이 풍미하는데, 서방 학자들의 눈에는 저발전 국가 중 성공한 첫 번째 사례로 등장하는 것이 한국이었다.

오늘날의 한국을 있게 한 대외통상 전략의 핵심은 경제의 세계화 추세를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세계화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타고 활용하는 것이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화의 덕을 가장 많이 본 나라는 한국일 것이다.

한·미 FTA는 한국경제의 비중과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킬 것이지만, 한·미FTA를 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인 의미에서 미국을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에 미국 군대를 끌어들여 안보를 확보했듯이, 미국의 자본 투자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여 한반도 경제통합과 탈냉전을 유도해내야 한다. 우리처럼 세계화 파도타기 전략에 성공해온 나라는 흔치 않다.

그런 우리가 80년대 종속이론의 포로가 돼 역사의 기로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경제문제에 대해 지나친 이념 지향성을 가지고 접근해서 국민들의 시야를 안으로 돌리도록 만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임민혁기자 lmhcoo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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