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방코 델타 아시아은행 전경./조선일보DB

“서서히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있는 것 같다.”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21일 미국 재무부가 주도하는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자료 분석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미국의 BDA 조사활동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지난해 제4차 북핵 6자회담 4차 2단계 회의에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된 직후 느닷없이 돌출된 사건이 BDA 조사였다.

이 때문에 두달 뒤인 11월에 다시 열린 5차 6자회담이 결렬됐고 현재까지 북한은 협상장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할 때 미 당국의 BDA 자료 분석작업은 적어도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돼 1년여가 지난 현재,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측이 “최종 분석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고 한 점으로 미뤄보면 작업이 마무리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현지 외교 및 정보 라인의 전언에 의하면 중요한 내용은 대략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이 ’북한 수뇌부, 나아가 북한 정권의 향방’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판도라의 상자’로 지칭되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은 = 미국 당국은 당초 정교한 위조지폐인 슈퍼노트(북한에서 제조된 것으로 의심되는 100달러짜리)가 어떻게 세탁되고 어떤 계좌로 입금되는 지를 추적하기 위해 BDA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위조지폐 세탁 외에도 예상치 못한 ’대어’가 포착됐다는 후문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위폐 뿐 아니라 마약거래나 북한의 외화벌이 거래 등에서 벌어들인 달러들이 이곳 계좌를 오고간 것으로 드러난 것 같다”고 전했다.

자연스럽게 이 계좌를 통해 거래된 달러의 최종 수혜자가 누구인지가 관심사로 추적됐다. 그 결과 평양의 북한 수뇌부가 망에 걸려들었다는 것. 당연히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포함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른바 ‘39호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 산하로 돼있으나 실제로는 김 위원장이 직접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39호실의 자금은 내각이나 다른 어떤 기관에서도 손을 못 쓰는 ‘성역’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정보 소식통들의 설명이다.

39호실의 실체가 잡히면서 해외 곳곳에 분산돼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이른바 ’통치계좌’로 조사활동이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은행의 북한 계좌와 홍콩, 영국 등에 있는 세계 유력은행 계좌가 BDA와 연계된 흔적이 포착됐다.

현재 정보통들은 해외 각국에 분산돼있는 통치계좌에는 대략 60억달러 규모의 자금이 예치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정체불명’의 자금도 BDA 계좌를 오고갔다. 특히 한국의 기업과 주요인사들이 개입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미 당국의 BDA 조사는 그 성격이 더욱 확대됐다고 한다.

현대아산측이 금강산 관광의 대가로 북한에 송금한 은행계좌도 이 조사과정에서 포착됐으며 일각에서는 한국 정치권의 자금도 조사과정에서 드러났거나 최소한 조사대상이 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외교소식통이 “북한이 6자회담을 박차고 나가면서까지 BDA 조사 중단과 동결자금 해제를 요구한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다”면서 “BDA조사 과정에서 동결된 2천400만달러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 통치자금의 향방이 북한 수뇌부의 마음을 급하게 만든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고 말했다.

◇BDA 조사를 담당하는 레비팀= 미국의 테러와 대량살상무기(WMD) 확산 방지 대책을 국제금융면에서 총괄하는 스튜어트 레비 미 재무차관이 이끄는 팀이 이 작업을 총괄한다.

레비 차관 일행은 특히 16-18일 동안 비공개로 서울을 방문해 외교통상부와 재경부, 금융정보분석원, 국가안전보장회의 등 관계기관 관계자들과 만났다.

일부 언론에서 그의 동선(動線)을 두고 안보리 결의안 채택 이후 제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는 보도를 한 데 대해 그의 활동에 정통한 외교소식통들이 “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고 냉소적으로 말한 것은 의미가 크다.

레비 차관 일행은 그동안 자신들이 해온 BDA 조사활동의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해주고 한국 정보 및 금융 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북한 위폐관련 정보와 주요 계좌의 거래 내역에 대해 확인 요청 등을 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BDA 조사결과 반드시 확인해야 할 대목이 한국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소식통은 “레비 차관은 BDA 조사활동을 실무차원에서 담당하는 전문가”라며 “그는 조사할 필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고 말했다.

레비 차관 일행은 서울을 출국한 18일에는 베트남으로 갔다. 그가 서울을 떠나면서 미 재무부 사이트에 올린 성명을 보면 한국에 이어 베트남-일본-싱가포르를 잇따라 방문하기로 돼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성명에서 “한국 정부측과 협의에서 세계 금융부분을 WMD 확산, 돈 세탁, 테러 자금을 포함한 불법활동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안에 관해 견해를 공유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측의 논의는 생산적이고 배울 점(educational)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확보한 자료에 대해 만족감을 느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일본, 싱가포르에서 레비 차관 일행은 한국에서 행한 활동을 그대로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에서는 BDA 조사과정에 포착된 일부 의심계좌(한국관련 계좌 포함) 등에 대해 현지 당국과 확인작업을 벌인 것으로 보이며 일본에서도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혐의가 있는 일본내 기업과 개인이 연관된 계좌 조사 등을 논의했을 것으로 정보통들은 보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도 레비 차관의 활동은 철저하게 실무적 조사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인다.

레비 차관의 동선과 관련, 일부에서 과거 ‘대북송금 의혹사건 특검팀’의 수사결과를 토대로 현대그룹과 당시 실력자가 개입된 대북 송금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드러난 것이 없다.

◇레비팀 조사 언제 끝나나= 외교소식통은 “레비 차관 조사팀의 활동이 거의 끝나간다”고 말했다. 이번 순방 조사를 토대로 조만간 최종 보고서 작성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레비 차관은 유명환 외교부 제1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과거 자신이 이른바 화이트 컬러 범죄를 맡아서 수사할 때를 상기하면서 ”복잡한 일이 많아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외교부 관계자가 전했다.

하지만 최소 6개월이 넘는 조사활동을 통해 복잡하고 어려운 조사작업을 마무리 지은 만큼 분석작업이 끝나는데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규모 은행이 즐비한 마카오에서 자산 규모면에서 뒤에서 네번째에 불과한 BDA는 대부분 거래내역을 전산처리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전표를 작성했기 때문에 레비팀의 조사가 특히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은밀한 거래 내역이 많았던 것도 조사활동을 더디게 했다. 조사팀은 중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자료를 일일이 스캔으로 떠서 컴퓨터에 보관했다. 그 작업이 대략 6월말에 끝났다고 서울의 외교소식통이 전한 바 있다.

조사대상은 BDA의 북한 관련 계좌 40여개로 알려진다. 당초 20여개로 추정하고 조사를 시작했지만 재무부 요원을 현지에 투입해 현장조사를 실시하면서 그 대상이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조사이후 파장은= 레비 차관팀의 BDA 조사가 끝나 최종 보고서가 나올 경우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라고 외교 소식통들은 입을 모은다.

북한 수뇌부가 달러를 모으는 과정이 얼마나 비정상적인가가 고스란히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과거 민간인을 납치하고 마약거래를 하며 위폐를 제조한 북한 정권의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투영될 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 외교소식통은 ”벌써부터 워싱턴에서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서 ‘체제변형’(공화당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 등) 또는 ‘정권 행태의 변화’(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거론하는 것도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미 정보당국이 북한 체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공작성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BDA 조사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미국측이고 이를 평가하는 것도 미국인 만큼 다른 객관적 견해가 개입될 여지가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추후 레비팀의 보고서가 나오더라도 북한측이 이를 정면 부인하거나 강력 반발하면서 한반도 정세가 다시 한번 요동칠 가능성은 상존한다./워싱턴 홍콩=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