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논설위원 ck-kim@chosun.com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한반도의 운명을 논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침략행위를 하지 말자”고 합의했다는 것이다.

1938년 9월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독일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놓고 히틀러와 담판을 벌였다. 런던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성사시켰다”고 선언했다.

히틀러가 “체코의 수데텐 지방만 넘겨주면 더 이상 영토를 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출범 때부터 대북(對北) 햇볕정책을 폈다. 노무현 정부도 이를 계승했다. 8년간의 햇볕은 김 전 대통령 말처럼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을까.

‘한반도 평화’라는 장부를 꺼내 햇볕이 남긴 자산과 부채를 비교해 보자.

자산목록부터 살피는 게 순서일 것이다. 햇볕론자들은 남북 왕래 발걸음이 잦아진 것만으로도 한반도 평화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햇볕정책의 대표 상품인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에 시작됐다. 지난 3월 말까지 관광객 수가 130만5000명이다. 이들은 경치를 구경했을 뿐이다.

북한 일반주민들과는 접촉도 못했다. 이런 관광 프로그램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전쟁을 방지하게 된다는 것인지 설명이 안 된다.

작년 가을 1만명 가까운 남쪽 주민이 평양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아리랑은 북한 청소년 6만명이 벌이는 매스게임이다. 물론 내용은 북한체제 찬양이다.

이런 공연을 1만명이 봤건 10만명이 봤건 한반도 평화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번엔 부채목록이다. 1998년 초 북한의 핵 능력은 “핵무기를 1개 내지 2개 만들었다”는 수준이었다. 2006년 현재는 “핵무기를 12개 만들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1998년 초 북한의 미사일 능력은 스커드 미사일(사정거리 500㎞) 발사에 성공했고, 노동 미사일(1000~1300㎞)은 개발 단계에 있다는 정도였다.

경제난 때문에 미사일 개발이 중단됐다는 말도 있었다. 2006년 현재 북한은 스커드 600발, 노동 200발을 손에 쥐고 있다. 800발 모두 남한 땅을 겨눌 수 있다.

한반도에 드리운 핵구름과 미사일 그림자는 8년 전보다 훨씬 짙어졌다. 그리고 거기엔 ‘햇볕’ 몫의 책임이 있다.

북한 미사일의 수출가격은 스커드가 20억원, 노동이 40억원이다. 북한 보유 미사일 800발의 가격 총액은 2조원쯤 된다. 제작원가를 수출가격의 절반 정도라고 가정해 보자.

북한이 미사일 800발을 만드는 데 1조원 정도 들었다는 추산이 나온다. 북한은 미국이 동결한 2400만달러(240억원) 때문에 발을 구를 정도로 현금사정이 궁하다. 북한의 미사일 제작비용은 어디서 난 것일까.

김대중 정부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건넨 뒷돈이 4억달러(4000억원)다. 금강산 관광객 130만5000명이 북한에 지급한 입경료(入境料)가 4억4500만달러(4450억원)다.

여기에 남북 이벤트마다 북에 바친 돈까지 합하면 현금지원만 1조원 가량은 될 것이다.

체임벌린과 히틀러 얘기로 돌아가 보자. 히틀러는 “더 이상 욕심 안 부리겠다”고 약속한 지 6개월 만에 체코를 통째로 삼켰다.

체임벌린이 말한 ‘우리 시대의 평화’는 어디로 간 걸까. 수데텐은 체코를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체임벌린은 유럽 안보의 현금 자산이나 다름없는 수데텐을 히틀러의 약속이라는 부도어음과 맞바꿨던 것이다.

북핵과 미사일은 8년 햇볕을 쬐며 몇 배나 증강됐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실체다. 그 대가로 얻은 건 남북정상이 한 차례 나눈 포옹과 수백만명이 남북을 넘나든 발자취다.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현금처럼 보인다면 착시현상일 뿐이다. 체임벌린이 빠졌던 바로 그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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