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前만 해도 원내대표로 뽑아놓고…
미래 아닌 과거만 판다고 여길 것같아”
지난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재오 최고위원을 13일 전남 순천시내에서 30㎞ 떨어진 선암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은 이 최고위원이 지난 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 6개월 간 숨어있던 곳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안식처였던 이곳에서 이번 전당대회 때 받은 ‘색깔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허허, 얘기하기 싫어”라며 입을 잘 열지 않았지만, 산책을 마친 뒤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당대회와 관련,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말은 “내가 당 대표가 안 돼서 이러는 게 아니다. 1등이 아닌 2등이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10년 동안 함께 한 동료에게 ‘색깔’을 덧칠하려는 한나라당의 행태에 화가 난 거야”라고 했다.
그는 “나는 그동안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 3번, 사무총장, 원내대표를 했다. 바로 6개월 전에 의원들 스스로 나를 원내대표로 뽑아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나를 빨갱이로 몰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민주화 운동하다가 옥살이 한 것도 억울하고 미치겠는데, 사람들이 그러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 패배한 뒤 당무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이재오 최고위원이 13일 전남 순천시 선암사에서 주지스님 등과 함께 절 주변을 산책하고 있다. /순천=김영근기자 kyg21@chosun.com
‘남민전’ 사건에 대한 설명도 했다. 그는 “난 당시 교사들 지하조직인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지도부라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신군부가 계속 날 잡아두려고 억지로 ‘남민전’ 사건과 연루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또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때 날 조사했던 최병국 의원(당시 검사)도 나중에 ‘이재오 사상은 내가 보장할 수 있다.
그는 우익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 때, 우리가 여당일 때 처음 공천을 받았다. 얼마나 사상검증을 했겠느냐. 그런데 이를 잘 모르는 일반인도 아닌 동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이 최고위원은 “국민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한나라당이 변해야 한다고 하는데, 당은 이러니 …”라고 했다. 그는 “한나라당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아직 껍질 속에서 자기네끼리 하려는 의식이 계속 있는 것 같다”며 “한나라당이 이런 역사의식, 정치의식으로 가는데, 국민들이 과연 어떻게 볼지 걱정이다.
한나라당은 미래가 아닌 과거만 파고 있다고 하지 않겠느냐. 이번엔 아예 적이 아닌 같은 편끼리 공격한 셈이잖아”라고도 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전당대회 직후에 ‘배신당했다”며 격앙됐던 마음은 가라앉은 듯 했다. “그래도 내가 6개월 간 모신 분인데… 내가 잘 모시지 못해서인지 아직까지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 걸 보면 마음이 슬프다”고 했다. 그는 계속되는 질문에도 더 이상 박 전 대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 최고위원은 한나라당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주말까지 산을 찾아다니면서 변화하는 한나라당을 만들 방법을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결국 화해와 단합은 피해자가 하는 거 아니겠어. 마음이 정리되는 대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김봉기기자 knight@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