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핵ㆍ미사일 위협 빌미로 군비증강·팽창주의적 행보 가속
‘전쟁포기 국가’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 부활 모색


북한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일본의 군사 외교적 움직임이 마치 때를 만난 것처럼 전례없이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지원 아래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을 주도하고 있고, 군사적으로는 외교안보 관련 핵심 각료들이 나서 북한 미사일기지 선제 공격론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론화하고 있다.

이번 미사일 사태는 일본이 그동안 우경화ㆍ군사대국화의 행보를 통해 축적해온 군사 외교적 영향력의 실체를 동북아시아에 충분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미사일 발사의 최대 수혜자는 항상 일본이다.

비단 미사일 문제뿐만 아니다. 일본은 그동안 핵위협이나 공작선 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제기될 때마다 ‘북한 위협론’을 빌미로 삼아 군사화 노선을 가속화해 왔다. 특히 일본의 보수우익 정권은 ‘울고 싶은데 북한이 뺨을 때려준 격’으로 전후 ‘평화헌법’ 하에서 견지해온 방위정책의 성역들을 하나 둘씩 제거했다.

이런 점에서 동북아 안보에 서서히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일본의 군비증강과 군사대국화 행보는 북한 핵개발ㆍ미사일 문제의 심각성에 비례해 구체화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대북 강경 노선을 주도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관방장관은 아마 ‘북한’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빨리 차기 총리감으로 부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북한 때리기’로 차기 총리가 유력시되는 집권당의 ‘실력자’로 우뚝 일어섰다.

◇ 일본의 군사대국화 배경 = 일본이 군사대국화 노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은 1990년대 들어서부터다.

그전까지의 소국주의적 태도를 바꿔 군비증강과 대외 팽창주의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보수 정권이 이처럼 군사대국 노선으로 선회한 배경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미국의 요청과 일본 내부의 변화가 그것이다.

냉전 종료로 세계 유일의 패권국이 된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질서유지를 위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일본에 ‘안보 분담’을 강력히 요구한 데다, 군사대국 노선을 걷지 않으면 안될 일본 내부의 구조적 변화가 있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일본 기업의 글로벌화가 가속화되고 지역ㆍ민족 분쟁이 잇따르면서 진출기업의 안정적인 시장 유지와 이익확보를 위해서는 군사대국으로의 정책 전환이 필요했다.

걸프전쟁은 일본의 재계가 정치권에 대해 군사대국화 요구를 공론화했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게이단렌(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 등 재계 단체들은 일본의 국제공헌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헌법 손질도 필요하다고 군사대국화 노선의 불을 지폈다.

일본이 전후 군사대국화를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재군비를 시도하고 헌법 개정을 끊임없이 모색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군사대국화의 야망을 포기하거나 그 시도가 좌절되곤 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가로막아온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포기, 비무장을 명시한 ‘평화헌법’ 9조, 현행 헌법을 지키려는 일본내 시민단체의 평화운동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던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반대도 주된 ‘장애물’이었다. 이와 함께 과거 ‘전쟁의 기억’에서 비롯된 국민들의 ‘전쟁 알레르기’도 일본의 재군비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

◇ 1990년대 들어 본색 드러낸 군사대국화 노선 = 그러나 일본은 멀리는 걸프전쟁, 가까이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9.11테러를 기화로 군사대국화의 크고 작은 빗장을 차례로 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보수우익 정권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개발 문제, 공작선 사건, 일본인 납치 사건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해 전후 군사대국화의 걸림돌이 돼 왔던 장애물과 안보성역들을 제거하거나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특히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은 전후 군국주의 부활 저지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일본내 평화세력의 몰락을 몰고온 계기가 됐다.

일본 정치권 일각의 ‘북한 선제 공격론’이 대담한 공론화 단계에 접어든 것은 이러한 평화세력의 입지가 현저히 약해져 견제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핵의혹과 미사일 발사는 일본 국민들의 직간접적인 ‘전쟁 알레르기’ 약화로 이어졌다.

일본정부가 북한을 군사안보 위협 대상으로 지목, 공개적이고 가시적인 방위력 강화에 착수한 것은 93년 5월 북한이 중거리 미사일 로동 1호를 동해로 발사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대두된 상태에서 미사일 발사 문제가 발생하자 당시 미국이 추진하던 ‘전역미사일 방위(TMD)계획’에 대한 참여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기 시작했다.

TMD는 정찰위성과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 지대공,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을 동원해 상대방의 미사일 공격을 사전에 막는 방위체제.

당초 일본은 로동 1호 미사일 문제가 터지기 전만 해도 미국이 구상중이던 TMD 참여에 대해 일본 헌법 해석상 행사가 금지돼 있는 집단적 자위권 문제, TMD 자체의 실효성 문제 등을 들어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나카니시 게이스케(中西啓介) 당시 방위청 장관은 1993년 9월 TMD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 ‘북한위협론’ 빌미로 군사화 행보 가속 = 일본이 독자적인 방공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4시간 대공 경비가 가능한 AWACS ‘4대 체제’ 확보를 서둘렀던 것도 이 무렵이다.

일본 방위청은 로동 1호가 발사됐던 그 해 7월 발표한 93년도 방위백서에서 가장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역의 하나로 북한을 지목하고 북한이 사정 1천㎞의 로동 1호 미사일 개발에 성공할 경우 배치 위치에 따라서는 일본의 절반이 사정권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북한위협론을 공식 언급했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은 당시의 중국-대만 관계 긴장과 더불어 일본 보수 세력의 ‘유사사태’ 논의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 역시 이에 편승해 냉전 붕괴에 걸맞는 미일방위협력지침(이하 가이드라인) 개정과 관련법 정비를 직간접으로 요구했다.

냉전시대의 제1 가상 적국이던 구소련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로운 역할과 임무를 모색해온 미일 양국의 이같은 노력은 96년 4월 일본을 방문한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의 신 미일안보 공동선언으로 집약됐다.

이 선언은 기존의 미일 안보조약을 사실상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나아가서는 전 지구 차원의 군사 동맹으로 확대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일본 내 호헌(護憲)파들은 당시 미국의 가이드라인 개정 요구가 94년의 북한 핵의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 핵의혹 해소를 위해 이라크 폭격 때처럼 북한을 정밀 공격하려면 일본의 전력이 필요한데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협력체제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 ‘대포동’ 앞세워 유사법제 관철 = 일본에서 북한위협론이 국가차원에서 전면 부상한 것은 북한이 1998년 8월31일 발사한 탄도 미사일 ‘대포동 1호’가 일본열도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을 때다.

이와 함께 그 이듬해 3월 발생한 북한 괴선박의 일본영해 침범 사건과 2001년 12월 동중국해에서 발생한 북한 공작선의 일본 EEZ(배타적 경제수역) 침범 사건은 국내외 여론 등을 감안해 미뤄져 왔던 방위력 증강과 유사법제 정비 등의 숙원을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로 이어졌다.

이른바 일본의 ‘방위족’에 힘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일본정부는 대포동 1호 발사 4개월 뒤 미국과의 TMD 공동 연구를 정식 결정했다.

일본에서 이른바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1999년 5월이다.

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은 일본 주변 지역의 분쟁 등에 대응하는 미군 지원을 골자로 한 ▲주변사태법안 ▲미일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ACSA)개정안 ▲자위대법 개정안 등 3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 법안은 전쟁포기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평화헌법’에 묶여 있던 자위대가 한반도 등 일본주변 지역에서 유사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군 후방지원 명목으로 출동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주변국으로까지 확대함으로써 전수방위의 개념이 사실상 무너진 셈이다.

이와 함께 정당방위를 위한 자위대원의 무력행사까지 허용했다.

가이드라인 관련 3개 법안은 일본의 군사적 영향력 확대와 전수방위 원칙 붕괴 등에 대한 주변국의 견제와 일본 국내의 우려 때문에 조심스럽게 추진되다가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북한 괴선박 침범 사건 덕택에 당초 우려됐던 큰 진통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일본의 군사전략이 공격적, 대외 팽창적 전략으로 바뀌는 분기점이 된 공중급유기를 일본정부가 도입키로 전격 결정한 것도 1999년이었다.

공중급유기는 그 도입 여부를 둘러싸고 15년 동안 논란이 빚어졌으나 야당이 전수방위 원칙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발하는 바람에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무기체계였다.

당시의 도입 결정에는 AWACS 공중 급유를 통해 북한의 탄도 미사일 발사에 대응할 수 있는 방공시스템을 정비하려는 목적도 한몫 했음은 물론이다.

99년 3월23일 동해상의 일본 노도(能登)반도 부근 영해에서 발생한 북한 괴선박 출몰 사건과 자위대의 ‘군사적’ 역할을 부각시키는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당시 영해를 침범한 괴선박에 대응하기 위해 자위대 창설이후 처음으로 해상자위대에 무력사용을 승인한 ‘해상경비행동’을 발동했다.

이에 따라 해상자위대는 구축함과 대잠초계기를 현장에 급파,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함께 괴선박에 경고사격을 가하고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며 추격전을 펼쳤다.

당시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었던 추격전은 괴선박이 다음 날 북한 영해로 들어가면서 일단락됐지만 자위대의 실체를 대내외에 과시했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해상보안청이 전담해온 일본의 해상경비에 자위대가 동원된 것은 처음이다.

자위대가 해상경비를 위해 무력을 행사한데 대해 ‘전수방위의 범위를 벗어난 선제공격을 벗어난 선제공격’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과 방위청이 추진해온 자위대 활동영역 확대를 위한 자위대법 개정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북한은 당시의 괴선박 사건에 대해 일본이 한반도 재침 준비를 위해 조작한 ‘자작극’이라는 궁색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은 1998년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북한 괴선박 사건 등을 호기로 삼아 이른바 유사법제라는 이름의 ‘전시대비 법제’를 밀어부쳤다.

유사법제란 일본이 국가로서 전쟁을 할 때 정부, 국민, 자위대 등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정한 법률로, 일본 중의원은 2003년 5월 ‘무력공격사태 대처법안’, ‘자위대법 개정안’, ‘안전보장회의 설치법 개정안’ 등 유사법제 관련 3개 법안을 여야의원 90%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했다.

일본정부가 1977년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 시절 ‘연구’라는 이름을 빌어 유사법제 검토에 착수한 이후 4반세기 만에 일본의 보수진영이 주장해온 ‘안보 숙원사항’이 해결된 셈이다.

일본은 이로써 패전 58년 만에 ‘전시’에 대비한 국가 체제 정비를 목적으로 한 법제를 갖게 됐으며 전수방위를 원칙으로 해온 일본의 안보 방위 정책은 일대 전환점을 돌아서고 말았다.

유사법제 가운데 ‘무력공격사태 대처법’은 일본이 외국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의 정부 기본 대처 방침과 의사 결정 절차 등 담고 있다.

자위대법 개정안은 유사시 자위대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민간 토지 수용 절차를 간소화하고 물자 보관 명령을 따르지 않는 민간인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 ‘전쟁포기’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 일본의 평화세력은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의 자위대 대응 방침 등을 규정한 유사법제가 과거 전쟁 때의 ‘국가총동원령’을 연상케 하는 ‘전쟁준비 법률’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유사 법제 관련 3개 법안은 공교롭게도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방문 첫날인 2003년 6월6일 참의원을 통과했다.

유사법제 관철은 일본이 ‘전쟁을 안하는 나라’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유사법제가 국회를 통과하자마자 일본의 여야당 의원 103명이 참여한 ‘신세기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은 ‘전수방위의 개념 수정’,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 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섰다.

이 모임은 긴급 성명을 통해 특히 북한의 핵보유를 저지하기 위해 정부가 가능한 모든 대응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며 “최소한의 적기지 공격 능력을 보유할 수 있도록” 현행헌법의 해석을 변경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논의 자체가 금기시됐던 유사법제를 ‘북한위협론’ 등을 앞세워 일거에 관철시킨 보수우익 진영의 다음 ‘투쟁’ 목표가 전수방위 원칙 수정, 집단적 자위권 용인, 헌법개정 임을 예고하는 성명이었다.

집단적 자위권이란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이 무력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응전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말한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 일본도 집단적 자위권을 갖고는 있으나 전쟁과 무력행사를 금지한 현행 헌법상 그 행사는 금지돼 왔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일본의 보수우익 진영에게 또하나의 ‘숙원 사항’이다.

이들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 불가야말로 일본 안보정책의 최대 결함이라며 정부의 헌법 해석을 변경하거나 헌법 9조를 개정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지난해 ’자위군’ 보유를 명기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승인했다.

이 개정안에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물론이다.

패전의 반성에서 탄생한 평화헌법 개정은 이제 ‘시간문제’로 보인다.

일본 보수 진영에서 ‘핵무장론’이 고개를 든 지는 오래됐다.

일본이 1990년대 들어 북한의 위협을 군비증강의 빌미로 적극 삼아왔듯이 북한의 핵개발 고집은 일본의 핵무장 빌미로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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