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 정치부장

20××년 10월 미국은 대선으로 또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이슈 중 하나가 북한 핵이었다. 한계 상황에 이른 북한은 핵폭탄 제조를 마쳤다고 공언하고 있었다.

한·미 정보 당국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북한 미사일 기술자들은 2006년에 실패한 대포동 2호의 결함을 찾아내 2007년에 기어이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대포동 2호는 일본을 넘어 4000㎞ 이상을 날아갔다. 일부 한·미 전문가들은 이 미사일의 최대 사거리가 1만㎞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 본토에 다다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미국 CIA는 북한이 이 미사일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만약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과 핵폭탄이 결합되면 미국엔 건국 이래 최악의 재앙이다.

미국은 핵미사일을 수천개 가진 소련과 대결했지만 그것은 ‘공포의 균형’이었을 뿐 실제 서로를 향해 핵미사일을 날릴 가능성은 이론적으로는 ‘0(제로)’였다.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날아올 가능성은 ‘0’가 아니었다. 북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김정일 위원장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핵과 미사일이 이란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미국은 건국 이후 이런 종류의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북한 내에선 국경지대에서 시작된 식량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인민들은 당 간부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사회안전원(경찰)들을 밀치며 식량 창고를 약탈했다. 군 출동과 공개 처형에도 사건은 계속 일어났다.

10월 어느날 대포동미사일을 실은 열차가 무수단리 발사장으로 향하는 장면이 미국 첩보위성에 포착됐다. 탄두 부분은 비어 있었다. 늘 그랬듯이 일본 언론이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특별성명을 통해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것, 대북 제재를 전면 해제할 것, 주한미군의 철수와 북·남 통일문제에 대한 외세 불간섭을 요구했다. 남한을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미국 CIA 국장은 김정일이 대포동미사일에 핵탄두를 결합해놓고 미국과 담판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미국이 불리할 수 있다는 분석도 추가됐다.

공화당 대선 후보는 선제 폭격을 주장하고, 민주당 쪽 전직 외교관들까지 이에 동조하는 가운데 민주당 대선 후보는 현 대통령의 대북정책 실패를 맹비난했다.

미군 지휘관들은 대포동미사일에 탄두가 결합되기 전에 파괴하는 작전이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괌의 앤더스기지 B-2 스텔스 폭격기들에 출격 준비 태세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의 대공 방어망은 B-2 폭격기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폭격기엔 GPS위성으로 유도되는 정밀 JDAM(합동직격탄)이 장착됐다. 괌에서 취재 중이던 AP통신 기자가 이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즉각 미국에 작전 행동 중지를 요구했다. 북한은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서울의 주식시장은 혼란에 빠져들었고, 여론은 유화론과 강경론으로 갈라졌다.

주한미군 기지 앞에선 한총련과 범민련이 연일 대북 공격 반대 시위를 벌였다. 김정일은 벼랑 끝 작전이 성공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함흥에서 400㎞ 떨어진 동해 바다 밑에선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공격 잠수함이 은밀하게 기동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에 탑재된 크루즈미사일의 컴퓨터엔 무수단리 발사장의 위치 정보가 이미 입력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작전 개시 명령이 북한의 대남 전면 보복으로 이어질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CIA와 군은 서로 다른 예측을 했다. 이때 전화 벨이 울렸다.

대포동미사일에 탄두가 장착될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는 보고였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이상은 그 가능성이 0.000…1%도 되지 않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누구도 ‘0’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이 현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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