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산하 핵폐기물 처리회사 부사장을 지낸 김대호(47)씨는 1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김정일은 스스로 ’노동당 131지도국(핵 개발 담당기구)은 나의 친위대다’, ’나는 핵개발의 총사령관이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핵개발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1985~87년 영변 핵 단지인 ’5월기계공업총국’(일명 분강지구)에서 근무했으며 1992년부터는 서해지구 채취대장으로 ’710호 자금’(핵개발자금)을 마련하다 1994년 4월 중국을 통해 입국했다.
김씨에 따르면 북한은 1982년 러시아 핵 기술자의 철수에 맞춰 농축 우라늄 및 핵연료봉을 맡는 ’8월기업소’와 우라늄을 생산하는 ’4월기업소’ 등에 현지 기술진을 대거 투입했다. 김씨 역시 1985년 핵개발 연대에서 제대해 다른 동료와 함께 4월기업소에 배치됐다.
1985-87년 당시 북한은 핵개발 시험단계에서 공업화로 이행하는 단계로 독립기구였던 원자력위원회를 원자력공업부로 개편하고 영변 핵 단지를 중앙당 소속으로 편입시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핵개발 부대가 속속 조직됐으며 관련 기술을 연마한 제대자는 다시 영변 핵시설에서 근무했다. 영변 핵 단지 기술진은 모두 ’평양시 중구역 충성동’에 주소지를 두고 북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북한은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외부로부터 핵개발 자금이 차단돼 우라늄 생산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김 위원장이 자체 외화벌이를 통해 핵개발 자재를 사들이라고 지시한 것도 이 시점이다.
김씨는 “710호 자금으로 일본에서 대량의 스테인리스, 펌프, 운반시설을 사들이고 중국에서는 각종 촉매제와 시약을 들여왔다”고 전했다.
또 북한은 해방 후 이승기 서울대 공대학장을 데려가 핵개발을 시작하고 1960년 핵 연구단지를 조성, 황해북도 평산.금천 등지에서 고순도의 ’3호 광석’(우라늄)을 탐사.채굴하는 등 핵개발의 역사도 길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1989년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했고 1992년 ’평양 101연구소’는 저온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 각 기업소에는 핵개발을 지원하는 ’710호 지휘부’가 설치돼 관련 물자를 최우선 공급했다.
김씨는 “북한이 핵개발과 미사일 등 2경제(군수부문)를 병행하면서 철저한 핵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며 “핵과 미사일을 총괄하는 전병호 노동당 비서는 자신의 동선을 김 위원장에게 30분마다 보고할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김일성 주석은 핵개발을 해야 열강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다소 민족주의적 관점이었지만 김 위원장은 ’핵개발로 조국 통일을 시작하고 총화(마무리)한다’는 호전적 입장”이라고 덧붙였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