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前 통일부장관·하영선 서울대 교수 대담
美 초조하게 만들려는 것이 北의 속셈
美의 ‘폭정종식 정책’ 국제적 명분 높아져


북한은 왜 미사일을 쏘았나. 그것도 중·장거리를 한꺼번에.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은 북한을 말릴 수 없었나? 북한의 다음 수는 무엇인가. 이제 6자회담은 생명을 다했나?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북한 미사일 발사에 얽힌 물고 물리는 궁금증들을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과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의 대담으로 풀어본다. 김현호 정치부 선임기자가 대담 진행을 맡았다.

▲정세현=북한은 6자회담에서 많은 걸 챙겼다. 작년 9·19공동성명에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약속을 받았다. 공동성명에 있는 보상 내용도 나쁘지 않고, 미·북 수교문제도 북한으로서는 상당히 유리한 결과였다.

거기까지 미국을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위조 달러 문제가 불거졌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지 미국을 초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북한 입장이다. 대미 압박용으로 미사일을 쏜 것이다.

▲하영선=지난 6월 1일의 북한 외교부 성명을 정독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해 자신들이 이미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전략적 결단’은 미국이 요구하는 ‘전략적 결단’과는 다른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라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 북한은 ‘물 위에 비친 달을 건지려는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선(先) 핵포기’ 없이 주고받는 것이 북의 전략적 선택이다. 6월 1일 성명은 힐 차관보가 평양에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북한의 전략적 결단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힐이 평양에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으로선 힐이 오도록 하는 방법으로 더욱 공격적인 수를 찾을 것이다. 그 수순으로 미사일 발사가 이뤄진 것으로 봐야 한다. 작년 9·19부터 이번 7월 5일 미사일 발사까지의 사태 전개는 미-북 쌍방이 서로 상대방의 전략적 선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고 점차 위협적인 수를 두는 과정이다.

▲정세현=북한은 “미국의 꽁지에 불을 붙여야 움직인다”는 말을 자주 한다. 미국의 위기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가 결국 미국의 동북아 리더십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미국 정부가 북핵문제 관리를 잘못했다는 국내외 여론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미 의회 쪽에서 대북 특사를 임명하라든지, 과거 페리 조정관처럼 대북정책을 재조정할 사람을 찾으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강수를 두게 되면 그런 요구가 더욱 높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을 북한과의 양자 접촉에 끌어내 여러 가지 이득을 챙기면서, 9·19공동성명 구도를 현실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화여대 석좌 교수(왼쪽)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오른쪽) /이덕훈 기자 dhlee@chosun.com


▲하영선=부시 정부는 북의 선 핵포기가 없이는 더 이상 북한과의 협상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6자회담이 풀려나가지 않으면 북한 체제 변형을 염두에 둔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해 나간다는 생각인데 북한의 이번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에서 대북 압력의 명분을 더욱 높이게 됐다고 판단할 것이다.

미국은 지금 취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대북 압력을 보다 느긋한 입장에서 추진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갖게 된 것이다.

▲정세현=미사일 발사를 북한 내부사정과 관련지어 특이한 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북한 주민들에게 힘든 시기에 고난의 행군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우고, 선군정치·강성대국 이미지를 강화해 인민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효과는 노렸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 인가인데 북한이 대포동 1호를 발사했던 1998년 상황과는 다르다. 당시 클린턴 정부는 기본적으로 개입정책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았기 때문에 북한의 희망대로 움직여 준 측면이 있지만 지금의 부시 행정부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의 계산이 잘못됐다고 봐야 한다.

▲하영선=북한이 핵문제를 9·11 이전의 사고와 방식으로 풀어 보려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미사일 위협이 9·11 이전에는 일정 부분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9·11 이후에는 미국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북한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9·11 이후에는 미사일 발사 같은 방식이 북한에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북한이 이번에 여러 미사일과 함께 대포동 2호를 쏜 것은 이것이 인공위성이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과시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정세현=북한으로선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 전쟁과 이란 핵문제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니 미사일을 쏘아도 미국이 세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또 미 의회나 공화당 안에서도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부시 행정부로서도 뭔가 새로운 접근을 모색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북한이 실제로 이런 판단을 하고 있다면 앞으로 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가능성이 크다.

▲하영선=부시 2기 행정부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는 9·11 충격과, 이라크 전쟁이다. 미국이 세계문제를 어떻게 짜느냐, 또 북핵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나가려는지를 파악하려면 이 두 가지 요소가 미국 외교안보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지난 3월 백악관이 작성한 국가안보전략보고서는 “미국은 전쟁 중”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부시 1기 행정부의 목표가 대량살상무기 테러를 방지하는 것이었다면, 2기 때는 폭정의 종식이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부시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목표 설정이 정확한 것이었다고 확신하게 만들 것이다. 미국의 대응은 단호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정세현=중국은 지도부까지 나서 북한에 미사일 쏘지 말라고 했는데, 괘씸하게 생각할 것이다. 북한이 어려울 때마다 도와줬는데 거꾸로 망신을 당했다고 여길 것이다. 앞으로 북중 관계가 단기적으로는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중국이 발끈해서 북한에 대고 “이제 네 맘대로 하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북을 끌어안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나갈 것이다. 중국은 북한을 나무라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도 더 강하게 문제 해결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 “무조건 선 핵포기부터 요구하면 문제 못 푼다”고 설득하려 할 것이다.

▲하영선=미국의 폭정 종식 방식은 중국의 묵시적 동의 없이는 힘든 상황이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이 좀 더 유연성을 가지고 테이블에 앉을 수 없느냐는 입장이었지만 미사일 발사는 중국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중국이 미국을 설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우리가 한 얘기 맞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게 됐다.

▲정세현=일본은 미국의 정책방향이나 문제 해결방식에 동조하면서 일본을 이른바 ‘정상(正常)국가’로 변모시키는 데 이번 미사일 사태를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하영선=미사일을 쏜 북한이나, 미국이나 중국, 일본 누구도 이게 마지막 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국의 전면적 대북 제재 같은 강수들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양측이 서로의 강경 카드를 동원하면서 위기가 고조되고 나면 협상 국면이 다시 열릴 수 있는 것이 북핵 위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미국보다 적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세현=한국은 그동안 해왔던 것에서 변형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식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새로운 해법을 창안해 그걸 들고 중국과 협조해 미국과 북한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영선=한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북핵문제를 보는 기본적인 입장을 냉정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는 섣부른 낙관론이나 비관론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미국과 북한의 입장 사이에서 한국이 ‘신(新) 해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제한적 역할만 주어져 있다는 엄연한 현실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친 이상론만 펼치다가는 국제 무대 위의 외로운 피에로가 될 수도 있다.

▲정세현=미사일과 남북경협을 연계시키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93년 북핵문제 터졌을 때 김영삼 정부가 핵과 남북관계를 연계시켜 우리 역할이 없어졌다.

남북관계를 더 심화 발전시켜 우리의 입지를 넓히는 것이 북핵해결에도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이 남북관계만은 보다 전향적으로 끌고 가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영선=그런 접근법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대북 압력을 늘리면 늘렸지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만 반대의 길로 갈 수 있겠는가. 국내적으로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여기고 대북 지원을 그대로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핵 해결의 비밀은 미국이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북한의 선 핵포기와 북한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수령체제의 유지를 어떻게 함께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안을 찾아내는 데에 숨어 있을 것이다. 북한 체제가 개혁개방을 이루고 일정부분 민주화되는 ‘민주수령제’가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정리=임민혁기자 lmhcoo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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