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매닝 - 미 외교협의회 선임연구원 겸 아시아담당 국장

김정일이 며칠 전 평양발 베이징(북경)행 기차를 타고 국제 외교 무대에서 처음으로 보여 준 모험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음을 상징한다. 김정일의 방중보다 훨씬 역사적 의미가 큰 남·북 정상회담이 설사 예정돼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김정일의 최근 행동들은 ‘북한이 정말 변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희망적인 분석을 가능케 한다. 북한의 변화 여부는 남·북 정상회담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다.

평화 통일과 북한의 연착륙 가능성은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 등 아시아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처럼 경제를 개방하고 시장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에 달려있다. 중국 지도부는 이번에 한 컴퓨터 회사로 김정일을 안내, 개방 경제가 가져올 수 있는 미래의 편린들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중국은 서방 세계에 공갈을 쳐서 기껏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연료를 얻어내는 북한의 냉전 후 생존 전략은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못된다는 점을 평양 측에 줄기차게 설득해왔다.

김정일은 현재 대외 군사 위협을 유지하는 ‘호주머니 속의 양보’를 하면서 제한된 수준에서 경제 개방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G7 국가 중 첫 번째로 이탈리아와 관계를 정상화했고 이어 호주, 필리핀, 브루나이와도 국교를 맺었다.

북한의 이 같은 새로운 대외 정책이 국내 변화도 의미할까? 북한이 경제체제를 개혁하고 개방하지 않으면 대규모 투자 유치를 하기는 어렵다. 물론 북한이 새로운 대외 관계 구축의 경계선상에서 실험을 하는 것 이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는 아직 없다. 다만 북한의 새로운 외교는 미국으로부터 무상 지원 받을 수 있는 한계에 이르렀고, 경제 제재 완화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프로젝트를 진척시키는 것도 어렵게 되자 새로운 지원 세력을 찾기 위해 다른 국가, 특히 한국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북한은 분명 이런 동기를 갖고 있다. 김정일은 권력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새로운 경제 정책을 채택하기 전에 베이징과 서울로부터 보증을 받으려는 것 같다. 북한의 경제 개혁은 초기에는 단계적이고 상대적으로 제한된 수준에서 추진될 것이다. 물론 김정일의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길은 없다. 북한의 의도를 테스트하는 것이 한국에 남겨진 도전이다.

북한이 대외 위협을 감축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는 북한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남·북한은 91·92년에 맺은 협정에 담겨 있던 경제위원회를 가동시키는 동시에 군사위원회를 열어 안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핵과 노동·대포동 미사일 문제가 협상을 통해 해결된다 할지라도, 북한의 1만1000개 야포와 스커드 미사일이 남한의 수도권을 사정권 안에 넣고 있다. 북한이 GNP의 25% 이상에 이르는 엄청난 군사 부담을 덜어낼 의사가 없다면 정상회담의 개최는 중요한 성과이기는 하지만 상징적일 뿐이다. /정리=주용중기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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