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과 김일성은 초기부터 무력 공격을 전제로 군사력을 양성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29일 열린 한국정치학회의 ‘해방 전후사 제대로 쓰기’ 2차 학술회의에서 한용원 한국교원대 교수는 주제 발표를 통해 “소련은 북한에 공산 정권부터 수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 한반도를 무력 통일하려 했다”며 “이에 따라 소련은 점령 직후부터 정규군 창설을 지원하고 충분한 군사력 증강 조치를 단행했다”고 했다.

한 교수는 “소련과 달리 미 군정은 경비 업무를 분담하기 위한 경비대 수준의 창설을 의도했다”며 “한국에는 공격용 무기가 아닌 방어용 위주의 무기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이념의 국제적 확대라는 목적 아래 현상파괴적인 공격적 군사력을 추구했고, 미국은 위협에 대한 자기 보존, 내부 치안 같은 목적으로 무력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 결과 미·소의 남북한 군대 창설은 근본적 목적과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홍용표 한양대 교수는 “소련이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팽창주의적 성격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 하지는 않아 왔다”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소련이 어느 시점부터 무력으로 남쪽을 통합하려는 북한의 공격적 관점에 동의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지수 명지대 교수는 “당시 세계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 체제 국가의 군(軍)은 공격 말고는 존재 이유가 없었다”며 “내부 수비는 보위, 내무, 안전부 같은 곳에서 하는 것인데 북한이 군을 창설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공격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6·25 발발 과정에도 미국과 소련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한용원 교수는 “스탈린은 1946년 7월 스티코프 상장에게 ‘최단 시일 내에 북한에 군사조직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며 “1948년 12월에는 북한·중국·소련의 군사대표자 회의에서 ‘18개월 내에 북한군을 남한 침략에 충분하게 증강시킨다’는 목표를 정한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공개된 문서들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게 북한의 남침 위협을 전하며 지원요청을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은 경제규모도 형편없는데 군사비를 쓸 생각 하지 말고 경제개발부터 하라’는 답을 한다.

군사전략적으로 한국을 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온창일 교수는 말했다.

이날 모인 학자들은 북한군 창설 과정에 일본군 출신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발제자인 한용원 교수는 “정확한 통계는 찾을 수 없지만 주요 인물들이 참여한 기록은 있다”고 했다.

온창일 교수는 “소련은 제정 러시아 출신 군인을 모두 숙청했다가 필요에 따라 무더기 재기용하기도 했다”며 “목적을 위해 수단의 정당성은 무시했던 전력을 볼 때 소련 군정하에서 일본군 출신을 활용했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했다.

사회를 맡은 이철순 부산대 교수는 “북한은 전부 친일파를 숙청하고 남한은 전부 일본군 출신이 장악했다는 것은 일종의 잘못된 신화”라고 했다. 한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한 자료를 좀 더 종합해 최종 논문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권대열기자 dy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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