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전북 군산 선유도에서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김영남씨가 29일 납북도 월북도 아닌 돌발 입북했다고 밝혀 그 주장의 진위 여부와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씨는 이날 금강산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선유도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일련의 해프닝 속에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인근에 있던 나무쪽배를 탔으며 깜빡 잠이 든 사이 배가 망망대해로 흘러간 뒤 북측 선박의 구조를 받아 북으로 가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난 시기 나의 입북문제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았는데 정확한 견해를 가졌으면 한다”며 “나의 입북은 납치도 자진월북도 아닌 대결시대 우연적으로 일어난 돌발적 입북”이라고 규정했다.

김씨의 ’돌발 입국’ 주장은 그간 남한에서 알려진 납북설을 부인하는 것이자 예상했던 ’자진월북’ 주장도 비켜가는 것이다.

김씨의 납북 사실과 관련, 남한당국은 지난 97년 “군산 앞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남녀친구 3명과 야영중이던 군산상고 1년 김영남이 북한 조사부(현 작전부) 소속 공작원 김광현(자수간첩)에 의해 납북됐다”고 확인한 바 있다.

또 김광현씨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배에서 일만 했을 뿐 납치는 공작조가 하는 일이야. 난 김영남씨 얼굴도 몰라. 그래도 결과적으로 김영남씨를 납치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니 자식 잃은 부모에게 참 미안하다”고 밝힌 바 있다.

김씨는 주위 상황에 의해 불가피하게 북한 공작선을 탔다고 주장하는 반면 당시 공작원과 우리당국은 분명히 납치됐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김씨의 납북 여부는 김씨와 그를 납치하는데 가담했다는 김광현씨의 대질에 의해 명확하게 가려질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같은 일이 어려움에 따라 향후 남북간 ’납북이냐 입북이냐’라는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하지만 이날 김씨의 발언은 납북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위해 뜯어볼 만 하다.

김씨의 입북과정 설명 가운데 “폭력배 같은 선배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것은 기존에 남한에서 알려진 내용과 엇비슷하다.

또 “몸을 피하기 위해 탄 나무쪽배가 망망대해로 흘러가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 배가 북측 배이고 도착한 곳은 남포항이었다”고 주장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러나 “점차 북쪽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굳어진 마음도 풀어지고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에 들었고, 여기서 공부하고 (고향에) 가면 되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이 계기가 돼 28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대목은 다소 석연치 않다.

당시 고교 1년생으로 16세의 나이였던 김씨가 당장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지 않고 이같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에 들었고’라는 말도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특히 ’여기서 공부하고 (고향에) 가면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라는 말에는 북한 공작원이 김씨를 설득한 말로 비쳐진다.

김씨가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북측 선박에 구조되었다 하더라도 북측 선박은 우리 영해를 불법 침입했을 개연성이 높다.

또한 북측이 미성년자를 구조, 곧장 북으로 데려간 뒤 남측에 어떤 형식으로든 통보하고 돌려보내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납북을 부인하는데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씨가 남측의 납북 주장을 정면 부인하고 이처럼 ’돌발입북’ 주장을 편 것은 ’납북자는 없다’는 북한의 그간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나아가 그 주장의 정당성을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적십자회담을 비롯해 남북 회담에서 납북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납북자는 없다’고 강조했다.

김씨의 ’돌발입북’ 주장은 북한이 앞으로도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종전과 같은 입장을 되풀이 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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