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입국' 밝히며 남측 언론에도 갖가지 주문 눈길

김영남씨는 29일 기자회견 내내 자신있는 모습이었고 진실성을 담기 위해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민감한 사안이었던 1978년 실종상황과 요코다 메구미씨 문제도 세세하게 설명했고 자신과 가족들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요구를 할 때는 단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였던 메구미씨 이야기를 할 때는 안타까움이,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에 대한 해명에서는 답답해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오후 4시 김씨는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금강산호텔 2층 회견장에 입장한 뒤 사각탁자 가운데 앉았고 왼쪽에는 누나 영자씨, 오른쪽에는 어머니 최계월씨가 자리를 잡았다.

당초 김영남씨의 북쪽 가족도 회견에 배석할 예정이었지만 이날 오전 북측의 입장 변화로 본인과 남쪽 가족만 회견장에 자리했다.

회견장에 들어서는 그는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모두발언을 시작하면서 표정이 굳어졌고 들고온 검은 서류가방에서 여러 장의 문서를 꺼내놓고 발언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라고 말을 꺼낸 김씨는 “남측 기자선생들이 알고 싶어하는 문제가 있으면 사심없이 말하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우선 기자회견 경위에 대해 “원래 누이와 어머니를 만나 회포를 풀고자 했으나 정확하지 못한 내외신의 말이 있어 사실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 인터뷰를 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회견 초반 남측 기자들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신상관련 질문을 하자 술술 답변을 쏟아냈다.

그는 부인 박춘화씨가 당학교에서 공부한다고 소개했고 자신의 장인은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라고 밝혔으며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고 자랑도 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통일관련 특수부문”이라고 설명하고 김철준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도 “특수사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남쪽에서도 특수사업을 하는 기관에서는 대외적으로 나갈 때 이름을 다르게 달고 나가지 않나”라며 남쪽 사정에 밝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민감한 질문에도 준비된 듯 답변을 이어갔고 전 부인 메구미씨의 사망경위를 설명할 때에는 “어떻게 산사람을 죽었다고 할 수 있느냐”며 격앙되기도 했다.

1978년 실종 경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전북 군산시 선유도해수욕장에 놀러갔다 선배와 다툰 뒤 쪽배에 올라탔으며 표류 중 북한 선박에 구조돼 남포항에 들어갔다는 것.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내가 말한 것이 진실이다. 다른 증언이 무슨 소용이냐”며 강하게 반박했고 고향 방문 의향에 대해서는 “지금 북남 사이 처한 상황을 볼 때 아직 그런 시기는 처하지 않았고 앞으로 기회가 조성되면 가보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그는 그 동안 떠돌던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저에 대해 이러저러한 부분, 정확지 않은 내용이 많았는데 자기 몸값 올리기 위해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부분이 있다”고 비난했다.

김씨는 특히 남측 언론에 대해 갖가지 주문을 내놨다.

그는 마무리 발언의 경우 준비해온 원고를 읽으면서 “나의 입북은 자진월북도 아니고 납치도 아니며 대결시대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돌발적인 입북”이라며 납북 관련 의혹을 정리했다.

김씨는 또 “8월 아리랑 공연에 누나와 어머니에게 평양 와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라고 했다”며 “평양 사돈과 인사하면 더 좋겠다”고 희망사항을 밝히기도 했다.

회견장에는 남북 당국자들과 북측 기자들도 배석했으며 북측은 사전에 남측 누나 영자씨에게 상봉 소감을 묻겠다고 밝힌 뒤 회견 끝 무렵 조선신보 평양 주재 기자가 소감을 질문했고 영자씨는 “동생을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준 대한민국 정부와 이쪽(북)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30분간의 회견이 끝나자 김씨는 어머니 최씨를 돌아보며 “나 잘했지?”라고 여유를 부리기도 했고 회견을 마치고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차나 한잔 하자”고 말한 뒤 금강산호텔 1층 커피숍에서 부인 박춘화씨, 은경양, 철봉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대신 다른 이산가족 상봉단이 다녀온 삼일포 참관은 건너 뛰었다.

당초 북측은 기자회견장에 들어올 수 있는 남측 취재진 수를 7명으로 제한했지만 막상 회견이 시작되자 제대로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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