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고교생’ 김영남(45)씨는 이산상봉 이틀째인 29일 금강산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입북은 “납치도 자진월북도 아닌 대결시대 우연적으로, 돌발적으로 일어난 입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전 부인인 요코다 메구미는 “1994년4월13일 병원에서 자살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김씨의 기자회견 일문일답 요지.

--북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 대학도 나오고 지금 중요한 직책에서 일도 하고 있다. 집사람은 당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장인은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을 하고 계신다.

--지금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특수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통일부문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통일사업 관심 높아 특수부문이라고 얘기를 한다.

--1978년 어떻게 어머니와 헤어지게 됐나

▲1978년 8월5일경 선유도 해수욕장에 놀러갔는데 선배 2명이 여자들에게 빌려줬던 녹음기를 찾아오라고 폭력과 욕을 해 바닷가 쪽으로 나갔다. 조그마한 나무쪽배가 있어 배를 뺀 후 누웠는데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망망대해였다.
그때 배가 한 척 지나가 구원을 요청을 했고 그 배에 올랐다. 후에 알고 보니 북측 배였고 도착한 곳이 남포항이라고 했다. 북이라고 해서 그 당시 겁이 나고 걱정이 앞섰다.

--그 후 어떻게 됐나

▲처음 며칠 동안은 잠도 못 자고 밥맛도 없었으나 북측 사람들의 친절과 특별 대우로 북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생각끝에 남에 다시 가야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여기서 공부 좀 하고 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여기 떨어지게 됐다.

-- 메구미씨에 대해 얘기해달라

▲86년 초 메구미에게서 일본말을 배우다 86년 8월 결혼했다. 3년간 딸을 낳고 잘 살았는데 메구미에게서 점차 병적 증상이 나타났다. 아이를 낳은 후 더 악화됐고 우울증을 동반하면서 정신이상 증상까지 나타나 94년에 병원에서 자살했다.

--메구미 유골을 일본에 건넸는데

▲2004년 11월 평양에 왔던 일본 정부대표단 만났을 때 메구미 문제 설명해줬고 유골도 넘겨줬다. 일본측 단장은 내게 직접 받았다는 것과 메구미 부모에게 책임적으로 전달하고 공표하지 않겠다는 자필 확인서도 남겼다. 그러나 유골을 여기저기 나눠주며 감정놀음을 벌인 끝에 가짜라는 졸렬하고 유치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은경양 외조부모(메구미씨 부모)가 은경양을 일본으로 돌려달라고 하는데

▲은경이는 메구미 딸이자 내 딸이다. 현재 조건에서 일본 당국이 취하는 사태 볼 때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스스로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남쪽에는 혜경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원래 본명은 은경이다. 어렸을 적 아명이 혜경이다.

--김영남 이름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름 공개가 사생활에 관한 부분이고, 본명이 알려지면 좋은 부분보다 나쁜 부분이 있고 그래서 다르게 말했다.

--77년, 78년 남측에서 고교생 4명이 사라졌는데 이민교, 홍건표 등 들어본적 있나.

▲나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바 없다. 잘 모른다. 이런 자리에서 내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셨는데 일본측의 관심은 어떻게 보나

▲내가 이곳에 와서 당과 국가의 배려로 이 만큼 성장했는데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입장에서 내 문제로 북에 해가 되는 관심은 백번도 필요 없다.

--대학에 대해 말이 이래 저래 말이 많다. 압록강대, 정치군사대 등.

▲금성정치대학 졸업했다.

--78년 실종에 대해 다르게 증언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유도에 상륙해서 데려갔다는 내용이 있어서.

▲내가 말한 게 진실이다. 다른 증언이 소용 있나.

--남쪽에 대한 특별한 기억, 친구들이나.

▲월명공원 가서 놀던 생각, 낚시 하던 생각이 많다. 동무들 이름도 기억이 난다.

--고향을 한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은.

▲지금 북남 사이 처한 상황 볼 때 아직 그런 시기는 처하지 않았고 앞으로 기회가 조성되면 가보겠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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