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때 아들 잃은 황은태씨

아버지는 4년 전(前) 전사한 아들의 휴대폰을 끄지 않았다.

2002년 서해교전 당시 참수리 357호의 자동포를 쥔 채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사망한 고(故) 황도현(黃道顯·당시 22세) 중사. 황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黃殷泰·59)씨는 아직 1.5평의 아들 방을 치우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씩 아들의 방을 찾아 향을 피우고, 불경을 튼다. 그리고 향 옆에 늘 충전된 아들의 휴대폰을 켜둔다. “언젠가 아들이 불쑥 전화를 걸어 ‘아버지!’라고 부를 것만 같아서….”

그는 아들을 못 잊는 게 아니라 잊고 싶지가 않다. 화물운송업을 하는 황씨의 15t트럭. 한 쪽에는 아들이 군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행여 얼굴을 잊어버릴까봐….”

가끔 일감이 들어온 기분 좋은 날, 집을 나서면서 그는 “도현아, 이제 일하러 가자”고 말한다. 그래야 일하러 가는 기분이 난다고 한다.



◇ 27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고(故) 황도현 중사의 집. 아버지 황은태씨가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아들을 그리워하며 아들의 휴대폰을 살펴 보고 있다. /남양주=원정환기자
고(故) 황중사는 4년 전, 북한 군과 격렬한 교전 중 이마 오른쪽 위에 적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쏴도 됐을 텐데… 도현이는 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쐈던 거죠.” 아버지 는 남다른 용기를 지녔던 아들이 오히려 원망스럽다. “지금도 전 월드컵이 싫습니다. 4년 전 거리응원을 하고 부대에 복귀하던 도현이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6·25때 북한군에 부친도 잃어

아버지 황씨는 55년 전 역시 북한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를 잃었다. 황씨는 1947년 전 경기도 양주에서 동네 이장으로 지내던 황순풍(黃順風) 씨의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황씨가 3세 때이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황씨의 아버지와 큰 형은 물밀듯이 내려오는 북한군을 피해 마을 근처 봉화산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황씨의 부친은 이듬해 1·4후퇴 때 결국 같은 마을에 살던 이웃의 고발로 북한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나중에 들으니까 북한군이 대꼬챙이 같은 걸로 찔러 죽였다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황씨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치고 사회로 뛰어들었다.

10여 년을 기능직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991년 크게 마음먹고 15t 트럭 2대로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건축자재를 운송하는 이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트럭 한 대를 팔아 치우고 나머지 한 대를 몰며 근근이 생활해갔다. 그런 그에겐 그래도 씩씩하게 자라준 두 아들이 황씨의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하지만 그는 4년 전 다시 한 아들을 끔찍하게 떠나 보내야 했다.

“북한에 아들과 아버지를 모두 잃은 그 비통함을 누가 알겠습니까.” 황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정부에 대한 울분도 터뜨렸다. “통일을 반대한다면 나쁜 거겠지만, 북한에 돈 퍼준다고 통일이 이뤄집니까? 햇볕정책이다 뭐다 하더니 서해교전은 왜 일어납니까?”

지친 마음에 생활고까지 겪고 있지만 황씨는 아들에 대한 추억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들이 좋아했던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歸天)’을 아들의 방에서 가끔씩 읊조린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아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아들은 사망하기 이틀 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집에는 별일 없어요? 전, 괜찮아요. 그런데…바다가 너무너무 조용해요.”/남양주=원정환기자 euticoc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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