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알던 조카 봉준호가 남한의 유명 감독이라니…”
어제 금강산서 14차 이산상봉
北 장녀 “난 영문학 전공… 조카 영화 보고 싶다”



◇ 제14차 이산가족 1차 상봉단의 단체상봉행사가 열린 19일 오후, 금강산 온정각에서 월북작가 구보 박태원의 둘째 아들 재영씨(왼쪽)가 북의 큰누나 설영씨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름만 알았던 조카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니…”

19일 제14차 이산가족 상봉이 실시된 금강산 온정각휴게소. 북에서 온 박설영(70)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丘甫 朴泰遠·1909~1986)의 장녀로 북한에서 살아온 설영씨는 이날 남한에서 온 여동생 소영(68), 남동생 재영(64)씨 등을 만났다.

설영씨는 이날 만남에서 소영씨의 아들이 유명한 영화감독 봉준호씨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2003년 ‘살인의 추억’에 이어 최신작 ‘괴물’로 호평을 받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구보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설영씨는 “나도 북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1997년까지 평양기계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손이 작아서 한 옥타브 이상 칠 수 없어서 피아노를 그만두고 영어 공부를 했다”고 밝혀 ‘구보’ 집안의 예술가 기질을 과시했다.

설영씨는 “준호라는 조카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애가 유명한 영화감독일 줄 몰랐다”며 “조카가 만든 영화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영씨는 아들인 봉준호 감독이 평소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외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게 아니냐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초기작 ‘플란다스의 개’ 등 자신이 연출한 3편의 시나리오까지 직접 쓰는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반세기 만에 한자리에 둘러앉은 구보의 4남매는 싸리나무로 둘러쳐 있던 성북동 옛집, 활달한 성격으로 학교 핸드볼 선수로 활약했던 설영씨, 남편을 그리며 홀로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등으로 울고 웃었다.

구보 박태원은 6·25전쟁 당시 친구였던 상허 이태준(1904~?)을 만나러 간다며 부인과 5남매를 남겨두고 북으로 갔다. 남겨진 가족은 1·4후퇴 때 서울 이남으로 피란했는데 장녀 설영씨만 외가인 서울 이화동에 남겨진 뒤 부친을 따라 월북한 뒤 소식이 끊겼다.

프로 문학이나 예술 지상주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았던 구보는 1930년대 서울을 무대로 근대적 삶의 풍경을 세련된 문체로 그려낸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천변풍경’ 등의 작품으로 현실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구현해낸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한 뒤 6·25전쟁 중 월북했지만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 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0년 복권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그는 북한에서 동료 소설가 정인택과 사별한 권영희와 재혼했다.

권영희는 ‘날개’의 작가 이상(李箱)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고, 구보는 그녀가 정인택과의 사이에 낳은 두 딸 정태선·태은을 친딸처럼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구보는 백내장과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는 등 30년간 병마에 시달렸다. 그는 1977년부터 ‘갑오농민전쟁’(전3부)을 발표하기 시작했지만 도중에 실명한 탓에 1980년 출간된 제2부부터 구보가 구술한 것을 권영희가 받아 적어 완성했다./금강산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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