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된 손주복씨 딸·손녀 脫北… 제3국서 떠돌아


◇1994년 12월 조·중(朝中) 국경지역인 중국 투먼(圖們)에서 안승운 목사와 손주복씨, 안기부 과장급 인사와 실무자급 인사로 추정되는 사람(오른쪽부터)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납북자가족모임 제공


탈북자의 신분으로 제3국을 떠도는 손영희씨 모녀. 서울행을 그리며 2년을 흘려 보내고 그들은 또 기다리고 있다.

지난 5월 중순 제3국 모처에서 만난 손씨는 단정한 옷차림에 화장을 곱게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경계하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손씨의 아버지 손주복씨는 북한의 엘리트였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태생의 손주복씨는 베이징(北京)대를 졸업한 엘리트로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해 1980년대 말부터 조·중(朝中) 국경 무역 사업에 종사했다.

손주복씨가 안승운 목사를 처음 만난 건 이 무렵인 1991년. 손주복씨는 안 목사를 통해 중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성경과 달러를 들여와 자강도 일대에서 몰래 선교활동을 폈다.

이런 가장의 행동에 가족은 불안했다. 영희씨는 “어머니가 ‘돈도 좋지만 당신만의 문제도 아니고 애들 다 어떡하려고 이런 위험한 일을 계속하느냐’고 하면 아버지는 ‘일 없다(염려할 필요 없다). 내가 잘못되더라도 애들은 다 잘 된다.

한국 정부에서 다 잘 봐줄 것이다”라고 전했다. 손주복씨는 결국 1996년 3월 ‘미제가 체계적으로 길들인 고정간첩’이란 죄목으로 총살됐다.

아버지의 총살 이후, 어머니와 오빠, 남동생은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갔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손씨는 더 이상 북에서 살 수 없었다. 탈북을 결심했다. 국경경비대에 붙잡히기를 수차례. 구류장에서 두 달, 노동단련대에서 한 달을 지냈다. 가죽 허리띠로 죽지 않을 만큼 맞았고, 구둣발로 짓밟힌 손씨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2004년 6월 탈북했다. 하지만 제3국에서 어린 딸과 함께 살 길은 막막했다. 현지 경찰의 눈을 피해 청소, 식당, 주방일 등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을 떼이면 다시 돈을 모으기 위해 딸과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딸은 생전의 아버지의 말 속에서 한국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1994년 초쯤 ‘안 목사가 내게 한국에 들어오라고 한다’며 가족들에게 속내를 털어놨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안 목사 이외에 안기부와도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12일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를 통해 공개한 사진에는 안 목사와 손주복씨, 그리고 당시 안기부 직원으로 추정되는 두 명이 함께 서 있다.

손씨는 사진 속에서 한 사람을 안기부 과장급이라고 지목하며, “아버지가 이 사람을 꼭 찾아가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옛 안기부)은 “신원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사진이 공개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기구한 사연을 때론 눈물을 고이며 담담히 전하던 손씨는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서울 이외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키워드 안승운목사 납북 사건

1990년부터 중국 옌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안승운 목사가 지난 1995년 7월 9일 북한 공작원 이경춘 등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됐다. 안씨는 1990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탈북자나 중국을 드나드는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성경을 전달하거나 돈을 지원했다. 안 목사를 납치한 북한 공작원 이경춘은 지난 1995년 7월 27일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됐고 중국 지린성 법원은 이경춘에 대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안준호기자 l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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