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씩 수퍼 점원 일 남편 생각하며 힘내죠
불에 탄 신분증 놓고 혼자만의 추도식 열어”


서해 교전(西海 交戰) 유족들은 월드컵을 잊을 수 없다.

6명의 젊은 장병이 연평도 근해에서 사지(死地)로 몰렸던 2002년 6월29일, 한국은 월드컵 결승으로 흥분했다. 이 비극은 해가 다르게 잊혀져 어느새 4년이 흘렀고, 서울은 다시 독일 월드컵으로 달아올랐다.

이 축제의 순간에 유족들은 다시 비극의 상처를 되새기고 있다.

서해(西海) 교전에 남편을 잃은 아내는 지금 뉴욕의 수퍼마켓 계산대에 서 있다.

4년 전 북한군의 포격에 불타는 고속정 357호의 조타를 끝까지 잡았던 남편 고(故) 한상국 중사. 2002년 월드컵 결승전 전날에 벌어진 서해 교전은 축제의 분위기에 어울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일방적으로 선전되던 남북한 화해 정책에 남북의 교전으로 6명이 사망한 것은 홍보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위로받을 수 없었던 아내 김종선(34)씨는 작년 4월 “한국에서 일이 없다”며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 오늘 현충일.. 서해교전 유족들 한자리에 2002년 월드컵 기간에 발생한 서해교전 전사자 유가족들이 5일 대전현충원을 찾아 고인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황은태·박공순 부부, 황덕희·윤두호 부부, 문화순·한진복 부부, 조상근·인헌순 부부) /대전=전재홍기자


그는 미국에서 손발톱을 다듬는 네일숍 종업원, 건물 청소부, 식당 직원으로 일했고, 석 달 전 한 지인의 도움으로 수퍼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오전 6시30분에 집을 나서면 저녁 8시 퇴근 무렵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서 있어야 하는 힘든 일. 하지만 그녀는 “견딜 만하다”고 말했다.

“전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다만 남편의 죽음을 당당하게 알리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이 미웠던 거죠.”

처음엔 마음도 몸도 너무 힘들어서 며칠씩 울기만 했다는 김씨.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남편이 바라는 내 모습이 이건 아닐 것’이란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지금도 하루 12시간 근무에 한 달에 150만원 정도를 버는 빠듯한 생활이지만 김씨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

그는 6일 미국에서 두 번째 현충일을 맞는다. 올해도 그는 단출한 혼자만의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다. 공휴일이 아닌 미국에서 그의 추모식은 짧다. 아침 일찍 수퍼마켓으로 출발하기 전, 남편의 유물을 꺼내서 기도를 올린다. 배와 가슴에 파편을 맞으면서 고속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남편은 화염에 그을린 유품을 남겼다. 일반 직장인 명함 크기인 남편의 군인 신분증은 사진과 이름이 새겨진 윗부분은 남아 있지만, 아래쪽으로 3분의 1 가량은 까맣게 타 있다.

“거창한 행사는 아닙니다. 남편에게 직접 못 가 보니 그저 혼자서 앉아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는 현충일 하루 전인 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남편의 죽음이 기억되길 소망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정부가 남편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젊은 청년이 나라를 위해 애쓰다 숨졌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알려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김씨가 외로운 추도식을 가질 때, 나머지 서해 교전 전사자 유족들은 한국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매년 현충일에 만나고 있다.

5일 전사자들의 유해가 묻힌 대전의 국립 현충원. 고(故) 윤영하 소령 아버지 윤두호(64) 씨, 고(故) 조천형 중사 부친 조상근(63)씨, 고(故) 황도연 중사 아버지 황은태(59)씨, 고(故)한상국 중사 아버지 한진복(61)씨 등 서해교전 전사자 유가족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故) 서후원 중사 부친 서영석(53)씨는 이날 저녁 대전에 도착했고, 고(故) 박동혁 병장 아버지 박남준(50)씨는 6일 새벽 합류하기로 했다.

담담하던 유족들의 얼굴은 정문에서 10분쯤 걸어가 묘비를 본 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전사자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는 단순했다. ‘2002년도 6월 29일 연평도 근해에서 전사’.

부모들은 무너져서 묘비에 적힌 아들들의 이름을 소리 높이 불러댔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요즘도 매일 아침 아들 방에 들러 아들이 읽던 책과 소지품을 뒤적인다는 황은태씨. 그는 “자식 잃고 맘 편히 사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하지만 내가 낙담하는 만큼 저 세상에 간 도연이 마음도 아플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힘내려고 한다”고 했다.

유족들의 바람은 단순했다. 자식과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탁상훈기자 if@chosun.com
김진기자 mozart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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