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역사학자 최신 저서에서 미국방부 입장 반박

6.25전쟁 당시 미군이 자체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난민들을 향해 총격을 허용하는 방침을 세워놓았으며 미 정부 고위층도 이런 방침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제시됐다고 미 AP통신이 29일 보도했다.

노근리 취재팀의 일원인 마샤 멘도사 기자는 뉴욕발 기사에서 미 역사학자 사흐르 콘웨이-란즈르가 1982년 기밀이 해제된 국립문서보관소의 문건들을 토대로 최근 펴낸 책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이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밝혔다.

군사용어로도 쓰이는 ’부수적 피해’는 군사행동에 따른 민간인의 인적·물적 피해를 뜻하는 것이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25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도 쌍굴다리 아래서 피란민 수 백명이 미군 총격에 무참히 학살된 노근리 사건은 1999년 AP통신의 특종으로 처음 밝혀졌다.

노근리 사건 사망자에 대해 미군측은 100명 이하에서 수백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한국인 생존자들은 약 400명이 사살됐으며, 대부분은 여성이나 어린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닉슨 (전 대통령) 정권 당시 문서인 ’닉슨 컬렉션’ 기록보관인으로 일하는 작가는 “(노근리 사건과 관련된) 추가 문건들이 발견됨에 따라 국방부가 당시 노근리 사건에 대해 밝힌 주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주한 대사였던 존 무초가 딘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훗날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이 서한은 노근리 학살사건이 자행된 바로 그 날 작성된 것으로, 6.25전쟁 동안 모든 미군 부대에 대해 그러한 방침이 시달됐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무초 대사는 당시 서한에서 “만약 피난민들이 미군 방어선의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경고사격을 하되, 이를 무시하고 남하를 강행할 경우에는 총격을 받게 될 것이다”고 보고했다.

서한은 또 이러한 방침이 제7기병연대가 노근리에서 학살을 벌이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25일 미 8군 고위 참모와 무초 대사를 대리했던 해롤드 노블 1등 서기관, 한국 관리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됐다고 전했다.

미 국방부는 AP통신 보도 직후인 1999년 10월부터 사건 진상규명에 착수, 무초 대사 서한 등 자료 100여만건 검토와 참전군인 171명에 대한 면담 등을 거쳐 2001년 1월 “사건 실체는 인정하나 발포 명령 여부와 피해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결론이 담긴 300쪽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양민학살 이유에 대해 “겁에 질린 병사들이 피난민 틈에 적이 숨어들어오는 것을 우려, 명령없이 발포한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불행한 비극”, “비계획적 살상”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책의 출간과 관련, 국방부의 베치 웨이너 대변인은 육군 감찰실이 13개월간 자료 조사 등을 통해 발표한 보고서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서술됐다”는 기존의 입장외에 구체적인 논평은 하지 않았다.

조사 당시 육군장관으로 현재 뉴멕시코대 총장인 자이드 루이스 칼데라는 “수백만쪽의 파일들을 검토했으나 이런 내용들이 빠졌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전문가로 노근리 사건 조사단의 활동을 검토했던 돈 오버도퍼 교수는 “당시 무초 대사의 이같은 메시지를 본 기억이 없다”면서 “당시 군조사단이 왜 모든 기록들을 빗질하듯이 꼼꼼히 조사했다고 주장했는 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전세계에 알린 최상훈 기자 등 3명의 AP기자(최상훈, 찰스 핸리, 마샤 멘도사) 등 노근리 취재팀은 국방부 보고서 발표 후인 2001년 저술한 ’노근리의 다리’(The Bridge at No Gun Ri)에는 20여건의 비밀 문서가 추가로 공개됐으며 당시 노근리 주둔 미군 부대장의 발표 명령과 전투기 출격 및 기총소사 등 명백한 기록이 증거물로 확보돼 있다고 주장해왔다./워싱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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