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만 해도 허준(허준)과 ‘동의보감’(동의보감)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국사시간에 배운 수많은 연대와 사건, 인명, 서명 가운데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정도가 보통이었다. 90년대 들어 고 이은성씨의 ‘소설 동의보감’으로부터 시작해 MBC의 두 차례 성공적인 드라마 방영으로 허준과 그의 저서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소설과 드라마에 나타나는 허준의 모습은 90% 이상 허구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허준의 행적이 사료로 전해지는 것은 극히 소량이다. 특히 ‘동의보감’ 편찬에 착수하는 50대 이전, 중년기까지의 행적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허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는 바로 ‘동의보감’이다. 그가 원숙한 활동기의 대부분을 쏟아넣은 이 작품을 바로 그의 분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 역시 ‘소설 동의보감’을 통해 허준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동의보감’이 ‘훈민정음’에 이어 우리 역사상 두번째로 중요한 문화유산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시작하게 됐다.

조선 후기를 통해 ‘동의보감’은 5~6차례 간행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같은 기간 중국에서는 12차례나 간행됐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간행됐다. 그 외에도 엄청난 숫자의 필사본이 국내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저술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이처럼 널리 유통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동의보감’이 중국 의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서 독창성 있는 작품도 못되고 우리 고유문화를 대표할 수도 없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 ‘동의보감’ 내용의 90% 이상은 중국 의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근대 학문의 관념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류다. 의학뿐 아니라 제반 동양학술은 ‘술이부작(술이부작)’의 원칙을 지켰다. 전승받은 내용을 깊이 소화해 새로운 체계로 풀어내는 데 학문의 의미가 있고,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체계에서 학자의 독창성이 나타났다. ‘동의보감’은 이 점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국내외 의학자들의 존중을 받았던 것이다.

‘동의(동의)’의 자존심도 오늘날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허준보다 3백년 전에 중국 의학은 남의(남의)와 북의(북의)의 두 큰 흐름으로 갈라졌다. 여기에 또 하나의 큰 흐름을 보탠다는 것이 허준의 뜻이었다. 중국 중심의 천하를 벗어나고 등지려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겠다는 것이 조선 지식인들의 주체적 포부였다.

일반인들이 ‘동의보감’의 실제 모습을 살피기에 좋은 판본이 근래 두 가지 나왔다.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신동원·김남일·여인석 지음, 들녘)은 뼈대를 추려 축역(축역)한 위에 여러 단계의 해설을 붙인 것이다. 학술과 교양의 목적으로 ‘동의보감’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책이다.

‘대역(대역) 동의보감’(법인문화사)은 세세한 처방까지 전문을 완역, 가정의학상비서의 모습으로 꾸민 책이다. 21인의 한의학 교수가 ‘국역위원회’에 이름을 걸어놓았지만, 북한번역본의 오역이 상당수 답습됐고 능동적 해설이 전혀 붙어있지 않은 것을 보면 독자적 연구와 번역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입체적 편집으로 원작의 장점을 잘 살리고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찍어 번역의 한계를 보완했다는 점에서 실용성을 높이 평가할 만한 책이다.

/김기섭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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