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스탈린 지령문 “북한 단독정부 시발점” “소련 구상 입증안돼”
48년 남한 단독 총선 “국제정세 흐름상 필연” “美·이승만정권 교감”


한국정치학회(회장 김용호 인하대 교수)는 20일 서울 서초구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린 춘계학술회의에서 ‘남·북한 정부 수립 과정 비교’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졌다.

이 토론회는 해방 직후 3년의 남북한 역사를, 이념이 아닌 실증적 검증을 통해 다시 쓰기 위해 정치학회가 추진 중인 연구 사업의 출발점이었다. 당초 3시간으로 잡혀 있던 토론회는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이날 주제발표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원로로 꼽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이정식 명예교수가 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 지령문

토론회는 시작부터 최근 발굴된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비밀 지령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9·20 지령’은 “소련 점령 지역에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정식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해방 한 달도 안 돼 북한 정부 수립을 지시하는 이 지령은 우리 민족의 통일 노력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자,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지수 명지대 교수는 “이 지령에 이어, 1945년 12월 25일 소련군 사령관의 보고서 역시 ‘스탈린의 9·20 지령에 따라서 적어도 한반도 북부에서만이라도 소련의 이익을 단단하게 보장해줄 인물로 구성된 정권을 수립…’이라고 돼 있다”며 “스탈린 지령을 시작으로 사실상 북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구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류길재 교수는, 그러나 “소련 역시 조선에 대해 무지하기는 미국과 마찬가지였으며 처음부터 구체적인 단독 정부 수립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서희경 연세대 연구교수도 “사전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구상으로 소련이 북한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

◆1948년 5·10 남한 단독 총선거 평가

논란은 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민족 분단으로 이어진 ‘매국(賣國)선거’로 봐야 하는가 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이정식 교수는 “이승만의 단독 정권 수립 주장은 분단의 원인이라기보다 미·소 관계 악화와 ‘철의 장막’ 등의 국제적 흐름에 의한 분단 과정의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이승만은 미국과의 교감 과정에서 미국의 의지를 감지한 뒤 먼저 치고 나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에 심지연 경남대 교수는 “5·10 선거가 매국적 선거였다고 하는데 단순히 북한보다 먼저 단독 선거를 했다는 시간적 이유만으로 분단책임까지 거론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비교”라고 했다.

이승현 국회도서관연구관은 “민족의 분열은 최종적으로 역시 한국전쟁 때문이었으며 5·10선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은 분열의 한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 이정식 명예교수


◆남북협상회의

5·10 선거 실시가 결정된 직후인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대한 평가도 나왔다. 이정식 교수는 “5·10 선거는 민족의 분열을 가져온 매국 선거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한국 내에) 많은데 이는 한국현대사의 아이러니”라며 “소련 군정은 해방 직후부터 북한에서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남북협상회의는 소련군의 치밀한 계획과 세부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해방 전후사의 인식’적 시각에선 김구 선생 등이 참석한 이 회의가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이 내용을 담은 결의문이 미 군정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통일정부 수립의 마지막 시도가 깨졌다고 보고 있다.

남광규 매봉통일연구소장도 “이 회의로 인해 쓸데없는 명분 싸움으로 비화되면서 오히려 분단 악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했다. 이정식 교수는 또 “동유럽에서 이미 공산당에 저항하는 모든 정당을 탄압한 바 있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반대한 조만식을 감금했는데, 미국과 남한 인사들은 당시 소련과의 타협을 꿈꾸고 있었다”고도 했다.


◇ 한국 정치학회는 20일 서울 서초구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열린 춘계학술회의에서‘남북한 정부수립 과정 비교-무엇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조인원기자


◆북한 토지개혁

북한의 토지개혁과 관련, 류길재 교수는 “북한의 토지개혁 이후 노동당원의 수가 급증한 현상 등을 볼 때 인민들의 호응은 상당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지수 교수는 “지주가 개인에서 국가로 바뀌었을 뿐 북한 인민들은 실제로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한용원 교원대 교수는 “남·북한 군대 창설 역시 점령군인 미·소 군정이 전부한 것”이라며 “미·소 군정의 점령정책과 군정통치, 군사력건설과 전력증강지원, 간부양성 등으로 나눠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권대열기자 dy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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