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의대교수 → 北에 종합병원 세워 → 쫓겨나자 단둥서 의료활동…
18년째 북한의료선교 펼치는 박세록 장로
자전 에세이 입소문 타고 인기 “좌절의 순간마다 예수님 만나”



◇ 박세록 장로는“미국 대학교수 시절보다 바쁘고 몸은 피곤하지만 훨씬 보람 있다”며“2004년에 이어 올해도‘사랑의 왕진가방’1만개를 북한에 추가로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완중기자


“크리스찬도 아니었던 제가 신앙을 갖게 되고, 특히 북한의료선교를 삶의 목표로 삼게 된 20년 가까운 세월을 되짚어 보고자 쓴 책인데 반응이 뜨거워 저도 놀랍습니다.”

재미 산부인과 의사 출신인 박세록(68) 장로(SAM의료복지재단 총재)의 자전 에세이 ‘사랑의 왕진가방’(두란노서원)이 개신교인 사이에 소리 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9월 출간된 책은 이렇다 할 광고도 없이 독자들의 입소문으로만 8개월 사이 2만 권이 넘게 팔려 나갔다. 돌풍의 원인은 무엇일까.

박씨는 “솔직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이 책에는 미국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주립대학 교수로 잘 나가던 한 중년 의사가 모든 것을 ‘던지는’ 과정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의대생 시절 서울대병원의 빈 병상을 찾아 잠을 청할 정도로 가난한 고학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출세한 과정뿐이었다면 평범한 성공담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안정된 노후를 설계할 나이이던 1989년 북한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한 후로 그의 인생은 급변했다. 북한의 열악한 의료수준과 환자들을 목격한 그에게 그때까지 귓등으로 흘리던 아내의 ‘교회 가자’는 말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왔고, 오히려 박씨가 더욱 적극적으로 ‘의료선교’를 생활의 중심목표로 삼게 된 것. 교수직도 그만두고 사재(私財)까지 팔아가며 설비와 장비를 갖춰 평양에 종합병원 문을 열었지만 1997년 북한은 그를 쫓아낸다.


그러자 그는 SAM의료복지재단을 설립, 신의주 건너편 중국 단둥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변에서 탈북자 혹은 강을 건너오는 북한 주민을 상대로 6개의 병원과 진료소를 운영하는 일에 착수한다.

전인미답의 길인 만큼 좌절과 실패는 무수했다. 그는 “그러나 좌절의 순간마다 예수님을 만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갖가지 트집을 잡는 북한 관리들 때문에 짜증이 났다가도 “내가 이렇게 답답하고 가슴 아픈데, 예수님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풀어졌다.

북한 당국이 김일성 시신에 절을 하라고 강요했을 때도 ‘주기도문’을 외면서 버텼고,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정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한 푼 없이 수십만달러짜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기도하면 기적적으로 돈이 모였다. 그는 “사재를 다 털고 나니 무릎밖에 꿇을 게 없었고, 무릎을 꿇었더니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한국과 미국, 중국을 오가며 간증집회 등을 통해 북한주민을 위한 의약품 구입자금을 마련한다. 6개월 후까지 일요일 집회는 꽉 차있을 정도다.

2004년 북한 용천역 폭발 사고를 전후해 다시 북한을 드나들 수 있게 된 그는 ‘사랑의 왕진가방’ 운동을 벌였다. 50달러어치의 비상구급약을 담은 왕진가방 1만 개를 북한에 전달한 것.

지금 그는 단둥과 신의주에서 임산부와 어린이용 비타민을 생산할 공장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책 판매수익도 모두 공장건립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다.

박씨는 “제 딴에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북한 전체로 본다면 약 한 톨 보내는 것이 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아무리 어려워도 곁에서 자신을 위해 사랑과 소망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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