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장 3만 6400곳 활용못해 한숨


◇ 평북 운전·박천군 일대의 운전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평북물길'

"물은 곧 쌀이고 쌀은 곧 공산주의다."

농사에서 차지하는 물(농업용수)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일성 주석의 말이다. 92년 4월 서해갑문-신천-강령·옹진 물길이 완공되자 물길 입구인 황남 신천군 청산리에 무게 250t의 대형 화강석에 이 말을 새긴 "명제비"가 건립됐다.

북한은 강수량이 적고 산악지대가 많은 자연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1950년대 말부터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관개공사를 시작했다. 60∼70년대에 주요 하천과 저수지를 중심으로 6개의 대규모 관개수리사업과 12개의 중규모 관개사업을 추진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관개망을 확대해 90년대 들어서는 2000리(800km) 물길을 완성했다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북한은 가뭄으로부터 해방됐는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특히 올해는 "천년만의 왕가뭄"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가뭄이 극심한데 "2000리 물길"은 이렇다할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우선 북한의 관개체계는 저수지 위주로 구축된 남한과는 달리 양수장 중심으로 되어 있다. 97년 현재 저수지 수는 1890개소로 1만8000여 개소에 이르는 남한의 1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반면 양수장은 98년 현재 3만6400개소로 남한(5600개소)의 6배를 훨씬 상회한다.

북한이 양수장 위주의 관개체계를 구축한 것은 기본적으로 소련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만 공사기간이 짧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점도 고려했다. 결과론이지만 이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양수장 위주의 관개체계는 풍부한 물과 양수기를 가동할 동력 보장을 전제로 한다. 조금만 가뭄이 들거나 충분한 에너지가 보장되지 못할 때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꾸준한 보수·정비와 세심한 시설관리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한의 양수장은 대부분 60∼70년대 건설한 것으로 시설이 낙후하거나 노후된 데다 관리마저 부실해 정상 가동이 안 된다. 양수기만 하더라도 관리가 잘 됐을 때 수명을 30년 정도로 보는데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북한 양수장은 전력을 동력으로 쓰고 있지만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농사철이 돌아오면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전력을 우선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호소가 언론매체를 장식하지만 언제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 현실이다.

양수기도 부품을 갈아주고 손질도 해야지만, 작은 베어링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고 고무 패킹이 없어 수세미로 감아야 할 형편이다.

많지 않은 저수지도 문제가 많다. 일반적으로 저수지는 물길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유역에, 농지보다 높은 곳에 조성한다. 하지만 북한의 저수지는 이런 상식의 틀을 무시하고 있다. 가급적 농지 가까운 저지대에 건설한 것이다.

저수지가 농지 근처에 있으면 수로 건설에 드는 비용과 노동력을 줄일 수 있고 공사도 고지대의 계곡보다 훨씬 수월하지만 가뭄이 닥치면 농지와 함께 저수지도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북한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양수기로 주변의 강·하천 물을 끌어올려 저수지를 채우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김정일 별장으로 유명한 평남 안주의 연풍호와 골프장으로 잘 알려진 남포의 태성호는 대표적인 양수 저수지(호수)다.

평남 안주·숙천·문덕 일대의 열두삼천리벌을 적시는 평남관개의 수원 연풍호의 경우 청천강의 물을 퍼올리고 대동강으로부터는 물길굴(취수터널)을 통해 용수를 저류하고 있다. 또한 평남 증산군 일대에 있는 기양관개의 주수원인 태성호도 대동강 하류의 물을 양수해 물을 채우고 있다.

북한은 고도 차가 큰 복잡한 지형상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강·하천의 물을 높은 지대에 퍼올리기도 한다. 높낮이 차가 심하면 여러 단계를 거치는 다단 양수체계를 쓰기도 하는데 황북 신계·곡산·수안일대의 미루벌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남강-미루벌 물길은 무려 12단 양수체계로 되어 있다.

양수 저수지든, 다단 양수체계든 양수시설이 있어야 하고 양수시설은 전력을 동력원으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제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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