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 서울대 교수 · 경제사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서점가에 깔린 지 하루 만에 초판 2000질이 다 팔렸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소수의 친일배(親日輩)들이 미국과 결탁하여 민족분단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6·25는 혁명적인 통일전쟁이었다.

” 이런 난폭한 이야기에 지난 20년간 시달려 온 대한민국의 다수 국민은 “뭐 좋은 읽을거리 없느냐”라고 기다려온 심정이었다. 그러한 국민적 여망이, 인문사회계 출판에서 전례가 없다는 출시 당일의 매진 현상을 빚어낸 것이다.

물론 입장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의 서문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이 책은 편집 도중 두 차례나 출판사로부터 출간 취소를 당하였다.

다른 두 출판사로부터는 검토 일주일 뒤 출간 불가(不可)라는 대답을 들었다.

약속된 출간일을 고작 보름 앞두고 출간을 취소해 온 출판사 사장은 “말이 안 되는 줄 알며 출판사로서도 금전적 손해가 크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의 취지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나는 그 사장의 비(非)금전적인 계산과 사상적 지조를 존중한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역사 인식에서 더없이 커다랗게 분열되어 있다. 왜 분열되었는가?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도그마가 강요될 때 공동체는 분열하고 해체된다.

도그마란 것은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 있으며, 세상만사의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어떤 단일한 요인에 의해 지배된다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세적이다.

반면에 근대과학은 여러 요인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을 특징으로 하며, 객관성의 기초로서 경험적인 자료나 데이터를 중시한다. 근대과학에서 도그마는 있을 수 없다.

죽은 사람들이 남긴 자료나 데이터는 불완전함이 보통이기 때문에 근대역사학에 요구되는 객관성의 기초 역시 언제나 불완전하며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는 언제나 역사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근대과학의 객관성은 궁극적으로 신(神)에 대한 연구자 개인의 정직성 고백에 기초한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은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 역사학에서 가장 타당하다.

역사학자에게 겸손의 미덕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그가 살고 있는 국가의 성립 과정과 도덕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살아있는 천만생령(千萬生靈)들의 공존공영을 보장하는 문명기구로서 그 공리성이 너무나 중차대하기 때문이다. 공자님이 조정에서 발을 서슴고 말을 부족하게 하였듯이 역사학자는 국가의 역사를 다룰 때면 두려워하며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내가 ‘해방 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이란 책에 비판의 날을 세운 기본 이유는 이렇게 근대 역사학에 요구되는 겸손과 두려움의 미덕을 거기서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무슨 근거에서 미국의 식민지였던가.

반면에 북한은 무슨 근거에서 혁명적인 민주기지였던가. 이런 기초적인 질문에 대해 그 책의 주요 필자들은 아무것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몇 번이고 이리저리 뒤적였으나 그런 기초적 질문과 그에 상응하는 논증은 시도조차 없었다. 그저 해방 전후 시기를 살면서 대한민국에 적대적이거나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나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엄밀히 말해 그런 이야기는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치’였지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근대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을 역사의 근본요인으로 치환한 중세적 근본주의 사고방식의 연장 형태일지 모른다. 근본주의에 근거한 도그마는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에 도그마가 강요되면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윽고 공동체는 분열하며 사회는 반목한다. 내가 ‘재인식’의 편집에 기꺼이 참가한 것은 드디어 그 도그마가 권력화하여 이른바 역사를 청산한다고까지 하여 공동체의 분열과 사회의 반목이 더없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