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선임기자의 남북워치]
83년 방문때 中개혁 비난·18년뒤 상하이가선 "천지개벽"
中에 의지해 벗어나려 하지만…남은 건 고립·굶주림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작년 10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고 중국 외교가에 알려져 있다.

“아시아의 사회주의는 몰락한 동유럽 사회주의와 다르다. 또 달라야 한다. 중국이 개혁에 성공했고 베트남도 잘하고 있다.

북한만 성공하면 아시아 사회주의는 유럽과 확실하게 차별성을 갖는다. 지난번(2001년)에 상하이(上海)를 보았으니 조만간 선전(深?)도 한번 보고 가라.”

김정일의 이번 중국 방문이 후진타오의 권유를 받아들인 답방 성격이며, 방문 목적도 북한의 개혁 개방 탐색 쪽에 무게가 두어져 있음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김정일이 평양으로 돌아간 후 발표된 북한 매체의 보도문에도 그가 중국의 발전상에 놀라고 찬양하는 말을 많이 한 것으로 돼 있어 북한의 개혁 개방에 관한 여러 가지 전망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흐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핵 6자회담의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미국이 작년 북한의 위조달러 제조를 문제 삼아 금융제재 조치를 취하자 미국 협상대표에게 “우리의 심장을 괴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급소를 제대로 눌렀다고 생각할 만하다. 굳이 김계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북한이 지금 목이 졸리는 듯한 심정일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 외무성이 “미국의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작년 10월 18일)이라고 선언한 데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정권의 통치자금(김정일 비자금)으로 쓰이는 외화의 주요 통로가 막혔으니 북한으로선 체제 차원의 위기를 느낄지도 모른다.

북한에선 금년 설(북에서는 양력 설을 쇤다)에 배급이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주어지던 술 한 병마저 사라진 것이다.

설에는 ‘배려 전기’라고 해서 전기도 하루 이틀 정도 넉넉히 주는데 금년에는 이것도 없었다고 한다. “공화국 창건 이래 이런 적이 없었다”는 것이 중국을 넘나드는 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북한이 최대 명절로 삼고 있는 김정일 생일(2월 16일)도 다가온다. 문제는 외화다. 주민에게 선물로 줄 술이나 식용유 등은 대부분 중국에서 들여와야 한다.

명절을 쇠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북한 정권으로선 외화의 숨통을 틔우는 것이 무엇보다 화급한 발등의 불이다.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의 은행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중국이 미국의 조치를 납득해 제재가 장기화되거나 확산된다면 북한으로선 견디기 어려워진다. 김정일의 중국행 발걸음이 다급해진 이유일 것이다.

북한 매체의 보도문은 김정일이 후진타오와의 회담에서 “6자회담의 난관을 극복하고 회담을 진전시키기 위한 방도를 찾는 데 중국과 같이 노력할 데 대하여 지적”하였다고 했다. ‘난관’은 미국의 금융제재일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의 지적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 묘하다. 보도문에는 후진타오가 북핵 문제에 관한 기존의 입장만 강조했을 뿐, 새로운 ‘난관’과 관련해 북한을 지지한다는 말을 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이 북핵 문제와 관련해 의례적으로 해 오고 있는 “조선의 합리적인 우려는 응당 중시되고 해결돼야 한다”는 발언도 이번에는 사라졌다. 북한이 미국의 금융제재와 6자회담을 연계하려는 데 반해 중국은 이 둘을 별개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관심을 끌고 있는 북한의 개혁 개방 가능성도 현재로선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특구를 늘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특구가 단순한 외화벌이 창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여기에 북한의 기업들이 들어와 시장경제 원리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개성공단만 해도 북한은 땅과 노동력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고 기업은 모두 한국 기업들이다.

더구나 김 위원장이 본격적인 개혁 개방을 위해 선군정치(군대 강화를 최우선으로 삼는 정책)를 포기하고, 협동농장을 폐지하며, 기업의 경영 자율권을 인정하는 등의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회의적이다.

김정일은 1983년 6월 처음 중국을 방문해 상하이 등을 둘러본 뒤 귀국해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이제 중국 공산당에는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다. 있는 건 수정주의뿐”이라고 비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덩샤오핑(鄧小平)은 “황취랑(黃嘴郞·주둥이가 노란 철부지라는 뜻) 때문에 중국의 안정이 위협받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석 달 후 다시 중국을 찾아가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 김정일은 중국행 발걸음을 끊었다. 그는 2001년 상하이를 다시 보고 “천지개벽했다”고 했지만 잃어버린 18년이 북한의 운명을 결정해 놓은 뒤였다.

김현호 선임기자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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