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납북자 가족들이 서울지방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납북된 이의 사진을 각자 목에 걸었다. /허영한기자 younghan@chosun.com

6·25중 납북 가족, 정부에 첫 소송
“정부 55년간 실태 파악조차 외면
손해배상·국가유공자 지정하라”


“拉北臨津江, 叫喚母喊聲. 束手無策拉, 飢寒空手去.(납북되어 임진강 건너는 길, ‘어머니!’ 소리쳐 울부짖네. 두 손 꽁꽁 묶인 채 추위와 배고픔 속에 빈손으로 끌려갔다네.)” 17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6·25전쟁 중 북한에 끌려간 납북인사 15명의 가족은 정부를 상대로 2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서류를 접수했다.

주민대표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끌려간 구순(九旬)의 김직자 할머니는 목에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건 채 소송 대열에 섞여있었다. 아들을 그리며 한시를 읊조리는 할머니의 한 손에는 지팡이가 들렸고, 다른 한 손은 딸이 붙들었다.

이날 민간인 납북자 10명의 가족들은 각각 1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고, 납북 공무원 5명의 가족들은 국가유공자 지정과 500만원씩의 배상금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는 “6·25전쟁 납북자 가족들은 5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부에 수차례 납북인사의 실태파악과 생사확인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북한의 도움 없이도 가능한 6·25전쟁 중 납북자 실태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피랍 공무원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도 제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협의회는 또 “남한에서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하여 생사확인이 되거나 상봉한 전쟁 중 납북자들이 단 한 명도 없는데도 정부는 정전 후 납북자 480여명만 언급하며 납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처럼 속여왔다”며 “이로 인해 일반 국민들도 정부가 납북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전 후 납북인사의 가족이 소송을 제기한 적은 있으나 전쟁 중 납북인사의 가족이 소송을 낸 것은 처음이다. ‘정부의 무성의’에 대해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전쟁 중 납북된 민간인은 변호사 2명, 회사 사장 및 간부 4명, 학원 이사장 1명, 전직 기자 1명, 청년 대표 1명, 중학생 1명 등이었다.

이 가운데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하다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한 이길용(1899년생)씨가 포함되어 있다.


◇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한 6·25전쟁 중 납북된 인사들. 왼쪽부터 당시 이길용 동아일보기자, 이주신 서울지검 부장검사, 권태술 서울 중구청장, 서승근 대법원 경리과장, 오헌식 영등포경찰서 치안관, 이봉우 농촌진흥청 곤충계장, 이성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 부친, 김근호 배재학당 이사장, 안호철 춘천중학교생. /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제공

공직자 가운데는 당시 이주신(1910년생) 서울지검 부장검사, 권태술(1903년생) 서울 중구청장, 서승근(1907년생) 대법원 경리과장, 오헌식(1899년생) 영등포서 치안관, 이봉우(1924년생) 농촌진흥청 곤충계장 등 5명이 포함됐다.

갑자기 이들을 잃은 가족에게 남은 세월은 ‘고통’이었다. 이주신 전 서울지검 부장검사의 아들 이경찬(67)씨는 “어느 누가 고생하지 않은 이가 있었겠느냐만 어머니께서는 자유당사의 사무실 청소 일을 하며 겨우 6남매를 키웠다”고 말했다.

갓 돌을 지나 아버지를 잃은 이봉우씨의 아들 상일(57)씨는 “스물 한 살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지만 난 커서 육군사관학교에 시험을 보려고 해도 신원조회에 걸려 시험조차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밥 벌이의 고통은 시간이 흘러가며 해결되었지만, 가슴 속 그리움은 세월이 지날수록 깊어만 갔다. 영등포서 치안관이었던 오헌식씨의 아들 세영(70)씨는 “아버지가 피랍되고 화병을 앓던 어머니는 1996년 돌아가실 때까지 아랫목 이불 밑에 꼭 아버지의 밥을 챙겨두셨다”고 말했다.

상일(57)씨는 “평생 소원이 ‘아버지’라고 불러보는 것”이라며 “피해보상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께서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돌아가셨다면 아버지 묘에 절하고 소주 한 잔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 얘기만 물어보면 눈빛을 또렷하게 세우던 김직자 할머니는 가방에서 다시 간절한 소망을 담은 한시를 꺼내 들었다.

“千秋惜恨 憑誰問, 寂寞荒墳 百日明.(천추의 한을 누구에게 물으리, 적막하고 거친 무덤이라도 알았으면 백일 내내 불이라도 밝혀줄 텐데.)”
/안준호기자 l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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