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김대중) 대통령은 오늘 특별한 날을 맞이했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지도자는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은 냉전구조의 마지막 장을 허무는 시도라는 점에서 국제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남·북한의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대치는 주변 4강의 역학관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냉전의 유산(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몇몇 한반도 전문가들은 또 다른 한국전의 가능성을 운운했고, 6~7년 전 북한 핵문제가 불거졌을 때 미국 일각에서는 북한을 공습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미리 예측되지는 않았습니다만 환영받아 마땅합니다.

윈스턴 처칠은 ‘싸우는 것보다는 대화로 푸는 것이 낫다’고 얘기했습니다. 또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풀기 위한 페리 보고서가 외교적으로 진일보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수용한 것은 앞으로 국제적인 협상에 나설 수 있는 국내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신호로도 읽혀집니다.

이제 평양행 비행기를 타는 김 대통령에게 무엇보다 명징하고 냉정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대를 많이 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는 망외(망외)의 소득에 놀라는 것이 낫습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상징’이 ‘실질’을 압도하는 상황은 위험스럽습니다.

두 지도자간의 개인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회담의 결과나 과정보다는 덜 중요하며 부차적입니다.

이번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큰 합의를 기대하거나 많은 문제가 풀리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양국간의 대화를 제도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산가족, 경제협력, 안보문제 등을 논의할 수 있는 위원회들을 가동시켜 현안들을 풀어나가는 틀을 만드는 것이 향후 관계진전의 가늠자가 될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많은 정상회담이 열리지만 으레 알맹이가 없는 회담도 많은 법입니다. 실무차원에서 양국간 문제를 실질적으로 협의해나갈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느냐 여부가 이번 정상회담 성패의 관건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와 더불어 이번 정상회담이 단순히 남·북간의 행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미국과의 대화를 고집해온 북한에 서울을 지나칠 수는 없으며, 남·북관계 진전이 미·북관계 진전의 전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에 많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 확산을 막고, 미사일 등 대량 살상 무기를 억제하는 문제는 미국의 세계정책과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중국도 작게는 북한의 난민문제를 비롯, 한반도의 장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남북문제를 대만문제에 버금가는 이슈로 중국은 받아들일 것입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통일한국이 적이냐 친구냐, 아니면 어떤 성향을 가진 국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냐가 중국으로서는 무척 중요합니다. 일본과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대통령은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이번 정상회담의 아젠다를 이들 국가들과 협의,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이 북한보다 주변국가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은 김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이익 중 하나입니다.

김정일은 때문에 이번 정상회담을 한·미간 또는 한·일간 우호관계의 틈을 벌리는 기회로 이용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외교적 잠재력을 신장시킬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이 미군 철수 문제를 앞으로 들고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내 일각에서 북한의 정체성에 관한 혼돈이 제기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6·25나 대한항공 격추사건 등 ‘과거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남·북한 사이에는 엄청난 심리적 협곡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50년간 분단체제를 가속화시킨 탓에 지리적으로 이웃일 뿐 얼마나 두 사회가 이질적으로 변했는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동·서독도 이처럼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미래를 위한 동인(동인)을 만드는 것이 과거를 푸는 작업보다 더 중요합니다. 과거문제는 이 같은 동인을 토대로 훨씬 뒤에 해소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정상회담이 남북화해의 ‘끝의 시작’인지, ‘시작의 끝’인지는 서서히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평양에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 리처드 하스 (Richard N. Haass)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 겸 외교정책 국장·전 백악관 특별보좌관

/정리=주용중기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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