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논설실장

서울의 수은주가 영하 10도에 이를 때면 평양은 영하 15~20도까지 내려간다. 1~2월이면 압록강 변의 혜산은 영하 30도를 넘나든다. 말 그대로 혹한(酷寒)이다. 그러나 북한의 겨울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계절인 것은 수은주의 깊이 때문만은 아니다.

거의 맨몸으로 이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북한 동포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온도계의 눈금으로는 도저히 측정해 낼 수가 없다.

임신부들이 겨울에 아기를 낳으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석탄 한 줌, 땔감 한 조각이 귀중품 중의 귀중품이니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 먹기가 쉽지 않다.

보통의 집에서는 제대로 산후 조리를 할 수가 없다. 산모와 아기는 방안으로 파고드는 냉기와 사투(死鬪)를 벌여야 하고, 혹한을 견뎌내더라도 평생 갈 골병을 얻게 마련이다.

기차역 대합실처럼 그나마 온기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그러나 이 온기조차 사라지는 새벽이면 여기저기 쓰러져 잠을 자던 아이들(꽃제비) 중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들도 생긴다.

평양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평양의 아파트는 대부분 중앙온수난방식으로 지어졌지만 온수가 공급되지 않아 겨울에는 거대한 냉장고로 변한다.

전기 부족으로 엘리베이터마저 움직이지 않아 힘 없는 노인들은 고층아파트에 갇힌 채 겨울 내내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집안에서 동사(凍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멘트 방바닥을 파내 아궁이를 만드는 집들도 있다. 방바닥에 비닐을 깔고 온몸을 감싼 뒤 불켜진 백열등을 껴안고 꼼짝없이 누워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겨울을 견뎌내는 최고의 생존 방법이다.

북한 주민들은 “지금이 일제 때보다 살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전에는 이런 말을 하다간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 십상이지만 요즘은 내놓고 말해도 큰 탈이 없다. 이런 사람들까지 다 수용소로 보내다간 수용소가 미어터질 판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신문을 보면 함경도 등지에서 기온이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면 여기저기서 사람이 동사(凍死)했다는 기사가 흔하다. 북한 신문들이야 이런 기사를 전혀 싣지 않고 있지만, 일제시대보다 더 어렵다는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감옥과 수용소의 참상은 더하다. 탈북하다 붙잡혀 1997년 함북 온성 감옥에 들어갔던 김성민 자유북한방송대표는 “1~2월에도 감방 쇠창살에는 유리나 종이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한데나 마찬가지인 냉방에서 구멍이 숭숭 난 담요 한 장으로 버텨야 했다”고 말했다. 요덕 정치범수용소 출신인 김태진씨는 “혹한에다 뜯어먹을 풀조차 없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모진 겨울을 이겨낸 사람들도 봄이 오면 몸이 풀려서 그런지 픽픽 쓰러진다”고 했다.

북한 수용소에는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와 납북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탈출해 나온 오길남씨는 북에 남은 부인과 두 딸이 수용소에 갇혔고 거기서 부인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10년 넘게 가슴에 담고 살고 있다.

북한의 겨울 참상은 식량과 생필품의 대북(對北) 지원 필요성을 더욱 절감케 한다. 동시에 지원품들이 정작 필요한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에 분배의 투명성을 요구하면 남북관계가 다칠 수 있다며 소극적이다. 더구나 북한에 수용소 폐지 등 인권 개선을 요구하라고 하면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라고 언성을 높인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미국에서 “북한 인권보다 한반도 평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둘이 함께 가야 할 인권과 평화를 양자택일 관계라고 강변하는 정부의 태도가 북한 동포들에겐 삭풍(朔風)보다 더 모질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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