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제17차 장관급회담에서 전체적으로 낮은 수준의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협력키로 한 점은 나름대로 적지않은 성과로 꼽힌다.

잇따른 악재로 내년 1월로 예정된 6자회담 재개 여부가 불투명해진 가운데 남북이 6자회담이 낳은 9.19 공동성명에 대한 이행 의지를 확인함으로써 6자회담의 추동력을 확보한 것은 물론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인 관리와 공동성명의 조속한 이행을 위해 안전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협 분야에서는 남북경협이 민족 내부의 협력사업이라는 원칙 아래 지역, 업종, 규모 면에서 투자와 협력을 확대하는 데 실질적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한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하지만 최대 관심사였던 군사당국자회담의 개최시기 문제에서는 진일보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날짜를 잡는 데 실패하면서 다시 한번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또 이산가족 대면.화상상봉의 차기 일정을 잡고 제7차 남북적십자회담의 2월 개최에도 합의했지만 우리측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를 문안에 집어넣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으로 꼽힌다.

아울러 치열한 공방으로 애초 예정보다 회담시간이 하루 가까이 길어진데다 막바지에 북측 대표단 상당수가 호텔 현관에 가방을 들고 나온 행동이 일종의 ‘압박용 시위’로 비쳐지면서 15차 회담을 계기로 시도된 새로운 회담문화와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다소 낮은 수준의 합의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우리측의 군사당국자회담 개최 요구와 북측의 방문지 제한 철폐라는 양대 이슈가 충돌한 데 따른 것이다.

우리측은 군사 당국자회담을 필두로 국군포로.납북자 생사확인, 열차 시험운행 및 도로 개통 등 진전이 없는 종전 합의사항의 실천에 초점을 맞춘 데 대해 북측은 남측 주민의 북측지역 방문지 제한 해제를 중심으로 이른바 ‘3대 장벽’에 대한 제거를 주장한 것이다.

우리측이 군사 당국자회담과 열차 시험운행 등의 구체적 택일(擇日)에 주력한 것은 이들이 이른바 ‘미이행 합의사항’인 열차 시험운행, 임진강 수해방지사업, 개성공단 통행 등 현안의 진전은 물론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앞당기는 데도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시기는 군사당국자 회담의 경우 ‘새해 들어 조속히’로, 열차 시험운행과 개성공단의 2단계 개발 및 통행.통관.통신 등 3통 문제 해결은 ‘조속히’로 공동보도문에 반영됐다.

문제는 종전에도 군사회담에 합의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만큼 이번에도 역시 실현될지 여부는 지켜봐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남북은 지난 6월 15차 회담때 “제3차 남북장성급 군사회담을 백두산에서 개최키로 하고 구체적인 날짜는 쌍방 군사당국이 정하기로 했다”고 한 데 이어 9월 16차 때에는 “군사당국자회담이 개최돼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합의했다.

심지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월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의견을 같이한 사안이기도 했지만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측은 3차 장성급 군사회담을 먼저 개최한 뒤 2000년 9월 1차 회담 이후 차수가 멈춰 있는 국방장관회담까지 열어 남북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위해 한 발짝 더 나아가겠다는 입장이어서 북측의 호응이 주목된다.

우리측이 군사회담에서 거론할 군사적 긴장완화 및 평화체제 문제는 6자회담 상황과 연동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금융제재를 둘러싼 북미 공방이 봉합되지 않을 경우 열리더라도 괄목한 만한 합의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난제로 꼽힌다.

막판까지 군사회담과 맞선 북측의 카드는 상대측 지역을 방문하는 자기측 인원에 대한 방문지(참관지) 제한을 중단하라는 요구였다.

이같은 요구는 북측이 지난 8월 자기측 8.15 대표단이 사상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을 방문한 데 대해 일종의 상호조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게 회담 관계자의 설명이다.

우리 정부는 명시적으로 방문지를 제한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우리가 끝까지 ‘방문지 제한’이라는 문구를 거부한 것은 이 문제가 사안에 따라서는 국가보안법 저촉 논란이나 남남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는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남북은 대결시대의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사상과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그를 위한 실천적인 조치를 취해나가기로 했다”는 공동보도문 1항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조항은 북측 입장에서는 ‘체제대결의 마지막 장벽’으로 제시한 정치.군사.경제 등 3대 장벽 가운데 정치적 장벽에 해당하는 부분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미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평화공존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언급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얘기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또 이미 9월 16차 회담에서도 “쌍방은 당면하게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낡은 관념과 관행을 없애고 남북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실질적 조치들에 대해 협의하고 실천하기로 했다”고 합의한 바 있다.

남북이 각각 나름대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상징적인 조항인 셈이다.

양측이 이구동성으로 올 남북관계를 높이 평가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5월 16일 차관급회담을 계기로 복원된 남북관계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6.17 면담’으로 업그레이드되고 9.19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을 예정 사항에 집어넣으면서 속도를 냈다.

실제로 올해 남북교역액이 10억달러를 돌파하고 올 한 해의 남북 왕래인원도 분단 이후 작년까지 60년 간의 8만5천400명을 넘어서는 괄목할만한 변화 속에 3대 기존 경협 외에 수산.농업.경공업.지하자원 협력 등으로 경협을 다각화하는 진전을 보였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 간 대화동력은 내년에도 쉼없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낳고 있다.

공동보도문을 통해 남북 사이의 경제협력이 민족내부의 협력사업임을 명시하고 지역과 업종, 규모 면에서 투자협력을 확대토록 조치하기로 한 것은 남북이 경협 확대에 공감대를 확보했음을 확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측이 이번에 이례적으로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운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역으로 정경분리 입장은 남북경협이 어느 한쪽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남북관계를 경협 중심에서 정치군사적 분야로 확대하려는 우리측 기조에 반하는 것일 수 있어 정부 대응이 주목된다.

특히 ‘3대 장벽’이 이번 회담에서 쓰고 버리는 일시적인 협상카드라면 문제가 없지만 내년에 해결해야할 과제라는 북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내년 남북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