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3월 동·서독 정상회담 당시 선발대장(선발대장)으로 회담장인 동독의 에어푸르트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에른스트 귄터 슈테른(68)씨는 서독의 수도였던 본의 외곽에 살고 있었다. 3년 전 퇴직,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단층집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슈테른씨는 낯선 한국기자가 15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인터뷰를 하러 온 데 대해 “놀랍다”고 말했다.

30년 전의 상황 중 잘 기억 나지 않는 부분은 낡은 파일들을 일일이 들춰가며 인터뷰에 응한 슈테른씨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며 “한국은 독일의 통일 경험을 활용하되, 이를 비판적인 자세로 수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70년 동·서독 정상회담 당시 선발대장으로 가장 먼저 에어푸르트로 들어 갔는데.

“당시 선발대로 언론·경호·의전 분야에서 총 5명이 갔다. 정상회담을 이틀 앞두고 선발대가 파견돼, 몹시 시간에 쫓겼다. 본에서 헬리콥터로 국경까지 가서 자동차로 에어푸르트에 도착했다. 당일 선발대 업무를 마치고, 다시 본으로 돌아왔다. ”

―실무회담과 선발대가 들어가서 동독측과 합의한 사항 중 동독이 회담 당일 위반한 것은 없었나?

“근본적 줄기에서 합의사항을 벗어나는 것은 없었다. 양측이 회담성사를 위해 무척 노력했다. 실무접촉에서도 메모 정도만 하고 합의서를 만들지도 않았다. 사소한 문제들은 회담 당일 현장에서 해결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

―분단 이후 처음 열린 정상회담이었는데 경호와 의전문제에 대해서는 만족하는가?

“정상회담이 이뤄진 절차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만족한다. 그러나 회담 내용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는다. ”

―왜 내용에는 만족하지 않나?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오전 확대회담에서는 양측 총리가 준비한 입장만 밝히고 끝났다. 1시간45분간의 오전 회담 후 수행원들은 오전에 동독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점심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긴급하게 오후 연설을 준비했다. 수행원들은 가위로 준비해온 연설문을 잘라 새 연설문에 붙이는 식으로 연설문을 다시 만들었다(웃음). 이날 회담의 유일한 합의사항은 2차 회담을 카셀에서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셀에서도 성과는 없었다. ”

―동독에서 무슨 내용을 제기했기에 식사도 못하고 가위로 연설문을 오려가며 연설을 바꿔야 했나?

“우리는 동독이 제기할 모든 분야에 대해 준비했으나, 동독이 서독에 대해 1000억 마르크를 배상하라고 한 부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브란트 총리도 오후 연설문이 궁금한지, 빨리 식사를 마치고 연설문을 보러 왔다. ”

―서독 정부는 정상회담에 대해 얼마나 기대했었나?

“회담에 참여한 정부 인사들은 처음부터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동독 주민들의 기대가 컸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대표단을 실은 기차가 지나갈 때 지붕 위에 올라가서 손을 흔들기도 했다. 도착한 역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회담 결과가 아무것도 없어 동독 사람들이 실망했다. ”

―그래도 70년 회담이 결국 통일 독일의 시발점이라는 평가인데….

“그렇다. 정상회담 후 서독의 에곤 바하르 정무차관과 동독의 미하엘 콜 정무차관이 74회 만났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동·서독 기본조약’과 ‘통과 협정’이다. 결국은 기본조약에서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것이 회담 이후의 큰 성과였다. 서독은 양측 주민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초를 확보했다. ”

―당시 동독 주민들은 서독 TV를 볼 수 있었다. 동독은 정상회담을 할 경우 체제 위협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왜 정상회담을 하자고 했나?

“우리는 당시 80%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 TV를 시청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동독도 주민들 사이에서 브란트 총리가 인기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동독의 시급한 문제는 서독과 서방국에서 국가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관계개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회담장에서 당신은 브란트 총리의 뒷줄에 배석했다. 회담 분위기는 어땠는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정말로 아주 지겨운 회담이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루했었다. 단 한 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으며, 토론이 아예 없었다. 서로가 준비해 온 원고만 읽었을 뿐 원고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없었다. ”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기자 616명이 왔는데, 동독에서 기자수를 제한하자는 제의는 없었나?

“없었다. 취재기자 허용은 전적으로 동독의 권한이었다. 본에서 출발하는 30~40명의 기자는 사전에 통보했으나 다른 기자들은 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왔다. 동구권에서도 많이 온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 많은 616명의 기자가 어디 있었는지 궁금하다(웃음). ”

―한국과 독일은 분단된 민족으로서 정상회담을 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는데.

“한국과 독일은 출발점은 같다. 단일민족에, 역사가 오래됐고, 전승국에 의해 강제로 분할된 것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많다. 특히 한국은 전쟁을 겪었고, 평화조약이 없는 상황이다. 또 경협 교류가 거의 없다. 결정적으로 북한에서는 한국의 방송을 볼 수 없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

―서독이 상대한 동독과 달리 북한은 특수한 나라다. 문호가 거의 열려있지 않다.

“협상할 때 무언가 받아내려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를 절대로 공개하면 안된다. 한국은 비료와 이산가족 문제를 공개했는데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뭔가 응분의 대가를 주고받을 때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 서독이 동독으로부터 정치범을 넘겨받을 때 돈을 준 것은 20년간 단지 몇 사람만 알고 있던 것이다. 독재정권은 체면을 중시하기 때문에 협상을 비밀로 해야 했다. ” /본(독일)=이하원기자 may2@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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