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金鎭洪 목사는 누구인가

1941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명大 철학과·장로교신학大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이던 1971년 청계천 빈민촌으로 들어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활빈교회를 설립해 도시빈민운동을 벌였다.

1974년 유신헌법 철폐운동에 가담했다가 李海學(이해학)·印名鎭(인명진) 목사 등과 함께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구속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13개월간 복역했다.

1975년 청계천 빈민촌 철거령이 떨어지자 金鎭洪 목사는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해 철거민들을 이끌고 남양만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모델로 한 공동영농사업을 전개했고, 1978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활빈두레마을을 설립했다.

1986년 소외계층 지원과 선교활동을 병행하는 제2차 두레공동체 운동을 시작해, 현재 지리산을 비롯해 중국·미국·북한 등에 두레마을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작년부터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하는 「뉴라이트 운동」을 모색해 왔으며, 지난 6월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빈민운동하면서,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4년 10월, 金鎭洪(김진홍·64) 목사는 柳根一(유근일) 前 朝鮮日報 주필, 申志鎬(신지호) 서강大 교수 등과 만나 과거 左派 집권세력에 맞설 방안을 모색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로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결집시키자」는 게 결론이었고, 이게 「뉴라이트」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그해 11월 초 동아일보는 이런 흐름을 「뉴라이트」라고 명명했다. 「뉴라이트」 운동의 등장은 盧武鉉 정권의 失政(실정)과 한나라당 등 기존 우익세력의 무기력함에 실망하고 있던 많은 국민들에게 한 가닥 시원한 소식이었다.

이어 「뉴라이트」의 기치를 내건 자유주의연대(대표 申志鎬)가 출범했다. 「뉴라이트 싱크넷」, 「교과서포럼」(상임공동대표 박효종),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대표 조전혁 인천大 교수) 등 「뉴라이트」의 단체들이 잇달아 출범했다.

지난 6월 지역단위 뉴라이트 운동 단체들을 포괄하는 「뉴라이트전국연합」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상임의장으로는 金鎭洪 목사가 선출됐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11월7일 정식 발족할 예정이다.

─두레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우리 사회의 4가지 오해」를 보니 시장·성장·경쟁·효율이라는 가치를 대단히 긍정 평가하셨더군요. 과거 도시빈민운동을 이끌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의 빈민촌은 참 비참했습니다. 서른 살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牧會(목회)를 해 보자」는 생각으로 청계천 빈민촌으로 들어갔습니다.

빈민촌이 좋아서가 아니라 「빈민촌을 없애자」는 생각으로 들어간 것이죠.

그 속에서 빈곤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 보니, 빈곤이란 개인문제이기 전에 사회문제예요. 그때는 「자본주의 체제나 정부란 부자들 편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늘 이렇게 짓밟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야 기본적으로 크리스천이니까 1980년대 운동권처럼 主思派(주사파)나 공산주의를 지향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했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하셨죠.

『나는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이나 안보 정책에 반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경제개발과 안보를 위해 민주주의의 룰을 파괴하고 인권을 희생시키면 그게 부메랑이 돼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손상을 준다고 생각했어요』


「완전 無소유」의 두레공동체 운동 추진

─감옥에서 나온 후 민주화운동을 접고, 두레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후, 獨房(독방)에서 성경을 많이 읽으면서 靈的(영적)으로 많이 승화가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정리됐어요.

감옥에서 나올 때쯤에는 「군사정부에 반대하고 데모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代案을 제시하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두레공동체 운동은 「代案으로서의 민주화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두레공동체 운동이라고 하면, 이름에서부터 集産主義的·평등주의적인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처음에는 「완전 無소유」의 완전한 공동체, 그야말로 한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사는 완전한 공동체를 구현하려 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요. 하루는 스무 가정이 모여서 한 밥상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탁 가운데 갈치 접시가 있었어요.

한 아줌마가 「우리 아이는 갈치를 좋아해」라면서 갈치접시를 자기 애 앞에 놓더군요. 그러자 다른 한 아줌마가 「누구 애는 갈치를 싫어하건디」 하면서 갈치접시를 확 끌어다가 자기 앞에 놓는 거야. 서로 잡아당기는 통에 상이 엎질러지고 난리가 났어요.

그걸 보면서 남자들은 「공동체는 여자들 때문에 안 돼.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한 게 실수여」라고 혀를 차더군요. 그런데 몇 달 뒤에 남자들 사이에 싸움이 나니까 공동체가 뿌리째 흔들려 버리더군요.

그래서 1년 만에 공동체 운동이 깨져 버렸어요. 사람들로부터 「金鎭洪은 사기꾼」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완전 無소유의 완전 공동체라니, 꼭 공산주의 같네요.

『기독교 초기의 신앙공동체에서 보듯이 원래 성경 안에는 공산주의·사회주의적 요소들이 있어요. 1986년 제2차 두레마을을 시작할 때 세 가지 모토를 내걸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공산주의의 기본이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생산성이 없어요. 내가 원고 쓰고 강연해서 번 돈을 두레마을에 다 가져다 넣어도 赤字 메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공동체 운동」한다고 온 사람들은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달걀 같은 생산물들을 슬쩍 빼돌리고…. 나중에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고 부담되는 사람들만 남더군요』

두레공동체 통해 사회주의의 모순 인식

─그런 문제점을 깨닫게 되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15년 정도 걸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경쟁과 인센티브 개념을 도입하면서 점차 공동체의 개념을 수정해 나갔어요. 그러고 나니까 점차 생산성이 오르더군요. 참으로 뼈아픈 과정이었어요. 두레마을 공동체 하다가 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손바닥에 땀이 나요.

그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확대시켜 놓으면서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면 그게 바로 사회주의·공산주의야. 나는 두레마을 공동체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는 생산성이 없어서 안 된다. 사회 자체가 이렇게 사회주의적인 공동체로 나가면 국제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金鎭洪 목사는 『전에 북한에 갔을 때, 북한 측 인사들과 식사를 하다가 두레마을이 그런 수정을 겪은 과정을 이야기했더니, 모두들 넋을 놓고 열심히 듣더라』고 했다.

『교회식으로 얘기하면 「聖靈(성령) 충만하게」 듣는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 입장에서는 그게 바로 자기들 얘긴 거예요. 새벽 2시까지 다섯 시간을 얘기했어요. 다음날 아침, 黨간부들이 「목사 선생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공산주의 동집니다」라면서 북한 거류민증을 주더군요』

『뉴라이트 운동이 자본주의 문제점 치유 역할해야』

金鎭洪 목사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는 魂(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西歐의 자본주의는 개신교 윤리를 바탕으로 형성됐기에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신교 윤리는 빠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어요. 베버가 말한 賤民(천민)자본주의의 3大 요소인 政經(정경)유착, 부패, 貧富(빈부)격차가 우리나라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어요.

이런 病理(병리)현상이 문제지, 자본주의 자체가 나쁜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는 아니니까 개신교 윤리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하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죠. 그래서 나는 뉴라이트 운동이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5년은 뉴라이트운동에 헌신해야 죽을 때 떳떳할 것』

─두레공동체 운동에 전념하다가 작년부터 뉴라이트 운동에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할 때에는 소박하게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근래에 와서 보니,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던 자유민주주의 말고도, 민중민주주의니 인민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이 있더군요. 그건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지요.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열린 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뉴라이트 운동에 나서게 됐습니다』

─1970년대의 소박하던 민주화운동이 1980년대 이후 변질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보수진영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原罪」가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朴正熙 대통령 시절의 개발독재입니다. 거기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불행히도 全斗煥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光州시민들을 총칼로 억눌렀습니다.

저는 光州사태가 우리 역사에 치명적인 독이 됐다고 봅니다. 민주화운동이 그때부터 恨이 쌓이면서 변질됐어요』

─1980년대 이후 운동권의 反美·親北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1980년대 反美 주장이 나올 때만 해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니 反美운동이 主思派운동, 親北운동으로 가더군요.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에게는 親北운동이란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우리에게 金日成이 朴正熙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였어요. 軍部정권이 나쁘다고 해서 「金日成 만세」를 부른다는 것은 운동권에 있어서 하나의 변질이고, 타락이었어요.

깜짝 놀란 우리는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反美하는 것까지는 이해해도, 주체사상이 군사정권의 代案이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타일렀어요.

그랬더니 「선배님, 그런 생각은 너무 낭만적이고 자기도 모르게 守舊세력에 협조해 주는 겁니다」 하는 식으로 얘기하더군요. 「이거 못 듣던 소리네. 니들은 하늘에서 떨어졌나」 하는 걱정이 들더군요』


『「뉴라이트」 실력 이상으로 너무 떴다』

─뉴라이트 운동이 출범한 지 1년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의 뉴라이트 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는 지난 1년간 언론에서 뉴라이트 운동을 실력 이상으로 너무 띄워 줬다고 생각합니다. 바닥에 두 발을 딛고 튼튼히 서야 운동의 지속성·역사성이 있는데, 너무 뉴라이트 운동을 띄워서 공중에 뜨는 사람, 단위조직은 별것 아닌데 유명인사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것은 운동에 亡兆(망조)가 드는 지름길이죠』

그동안에는 작년 11월 출범한 자유주의연대가 뉴라이트 운동을 사실상 대표해 왔다. 지난 6월 지역단위의 뉴라이트 운동 단체들이 「뉴라이트전국연합」 발기인대회를 열고, 지역대표자들을 공개모집하자, 자유주의연대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짝퉁』이라고 비판했다.

한편에서는 柳錫春(연세大) 등을 중심으로 「뉴라이트전국연대」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뉴라이트 운동의 분열 양상에 대해 金鎭洪 목사는 낙관적인 견해를 펼쳤다.

『뉴라이트 운동 단체들은 출발점이 다르고, 나름대로 특성이 있어,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크게 보면 左派에서 전향한 386그룹(자유주의연대), 지역에 기반을 둔 그룹(뉴라이트전국연합), 교수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그룹(뉴라이트전국연대)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기본적으로 보수운동이고, 2007년에 右派정권을 출현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으며, 자유화·선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요.

이러한 공통점을 바탕으로 단체들 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느슨한 連帶(연대)를 추구한다면, 뉴라이트 운동 그룹들의 통합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金鎭洪 목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과 뉴라이트전국연대는 현재 통합작업을 추진 중이며, 11월7일 뉴라이트전국연합 출범식에서 통합을 선언할 것』이라고 밝혔다.

金鎭洪 목사가 상임의장으로 있는 뉴라이트전국연합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 가운데는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에 공천을 신청하거나,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사람, 자민련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반면에 뉴라이트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사상운동·사회운동이라는 점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이 운동을 통해 정치·사회적인 반대급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우수한 인력들이 많이 참여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상반되는 주장에 대해 金鎭洪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운동의 문호는 넓게 개방하되, 중심은 좁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뉴라이트 운동에 전념하는 사람도 꼭 필요합니다. 나는 2007년에 右派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목회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나는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치참여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중앙정치든 지방정치든 활동성이 있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 제쳐 놓고 나면, 백면서생들만 모아 놓고 손가락만 빨란 말입니까?

가능하면 뉴라이트 운동 출신 人材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하되, 「뉴라이트」 조직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곤란하겠죠. 아울러 문화운동이나 시민운동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金鎭洪 목사는 『나는 「혁명가는 수도승의 경건함과 혁명가의 정열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레닌의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단순한 시민운동이나, 환경 등 특정분야에 국한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체를 지키고 이 나라의 미래를 바로 세우는 운동을 하자는 겁니다. 아마추어적인 자세로는 이 혼란한 시기에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내가 뉴라이트 운동을 하겠다니까 「그 나이에 왜 사람들 구설에 오르내릴 일을 하느냐」며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나는 평생 예수사랑, 나라사랑 두 가지 점에서는 일관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옛날 島山 安昌浩 선생이나 白凡 金九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던 마음으로 내 남은 인생 가운데 4~5년은 뉴라이트 운동에 헌신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죽을 때 떳떳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금년 중 100개 대학에 뉴라이트 동아리 만들 것』

─방송·인터넷매체·시민단체 등 집권을 위한 인프라는 左派가 장악하고 있고, 右派를 대변해야 할 한나라당이 헤매고 있는데, 2007년 右派정권 창출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가능하다고 봅니다. 내년에는 적절한 시기에 右派 개혁세력의 大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다만 뉴라이트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현실정치는 정당이 맡아야 합니다.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또 다른 정당이든 다 「原罪」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右派정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리 밑의 거지까지도 힘을 합쳐야지요.

다만 중심에는 개혁세력이 확고하게 포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에 희망이 있고, 중간에 있는 사람들도 大選에서 지지하지 않겠어요?

결국 중간의 浮動票(부동표)가 어느 쪽을 신뢰하느냐에 따라 2007년 大選 결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 방송을 잡았으니 유리하다」, 「청년·대학생들의 성향이 어떠하니 유리하다」 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소리라고 봅니다』

─뉴라이트 조직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뉴라이트 운동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대학생 조직입니다. 현재 약 30개 대학에서 뉴라이트 동아리의 기틀이 잡혔어요. 금년 중으로 100개 대학에서 뉴라이트 동아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대학가에서 앞으로 舊운동권은 한총련, 新운동권은 뉴라이트라는 것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둘째는 전국 市·郡에 뉴라이트 지역조직을 만들 것입니다. 현재 국내 42개, 해외 8개 지역에 조직이 결성되어 있습니다. 금년 중으로 100개 지역으로 확대할 것입니다. 뉴라이트 성향의 지식인 단체들과도 연대해 나갈 것입니다.

뉴라이트 조직은 정당처럼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아니라, 단위조직들이 모여서 중앙을 만드는 느슨하고 자율적인 連帶조직이 될 것입니다』

─대학생 교육은 잘되고 있습니까.

『현재 대학생들은 직장이 없고,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요. 이것은 左派에게만 기회가 아니라, 右派에게도 기회입니다』

─대학생들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全敎組 교사들의 영향 등으로 감정적 민족주의에 쉽게 좌우되는데요.

『원래 민족주의는 右派의 것입니다. 左派는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했을 때부터 국제주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유일한, 장준하 등에서 보듯 민족주의의 맥을 이어 온 것은 右派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右派들이 反共·親美·경제성장·안보만 외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민족주의」를 左派들에게 빼앗겼을 뿐이죠』

『실내에만 머문다면 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뉴라이트 운동에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1980~1990년대 左派는 감옥에 가고, 두들겨 맞으면서, 주체사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상을 가지고 오늘을 쌓았어요. 우리는 그들의 3분의 1 정도만 노력해도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그들보다 훨씬 좋은 상황에서 「자유주의」라는 좋은 이념을 가지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죠.

뛰어보지도 않고 앉아서 한숨쉬고, 불평하고, 미국으로 돈이나 빼돌리고, 이런 짓 하면 승산 없지요. 사명감을 가지고 뛰어들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뉴라이트 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조직이 정비되면, 예컨대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 등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지요. 좌익들이 3000명 정도가 모여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우리는 1만 명 정도가 나가야지요.

TV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를 놓고 토론하는데, 이것은 토론거리도 아니예요. 토론거리도 못 되는 것을 가지고 토론하자고 할 때는 그 녀석들이 흑심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과감하게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이론만 가지고, 예배 보듯이 실내에만 머문다면, 뉴라이트 운동을 운동이라고 할 수 없지요』

─아까 북한에 다녀오신 얘기를 했는데, 언제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한 4년 전인가? 마지막으로 다녀온 것이 2003년이고…. 나진·선봉 인근에서 감자농장을 했어요. 종자보급·영농기술 전수 등을 하는 일종의 시범농장이었어요. 잘되니까 그 사람들이 못 하게 하더라고. 농민들은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위에서는 싫어하더라고…』

『북한에 달러를 주는 것은 반대』

─무슨 뜻입니까.

『농사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이 접촉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걸 거북해하는 것이죠』

─북한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북한 민중을 돕는 일은 누구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그것은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달러를 주는 것은 반대예요. 관광객들이 북한에 많이 가는 것은 달러입니다, 달러. 북한에서는 「한 명당 몇 달러」 하는 식으로 돈 계산을 하지, 남북화해를 생각이나 합니까?

북한 관광은 영상을 찍어 와 TV로 보면 되는 것이고, 북한 주민들과 직접 접촉해 도울 길을 찾아야죠. 이건 유치원생도 아는 거예요.

그런데도 자꾸 달러를 주는 것은 흑심이 있거나,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서독이 동독을 도왔지만, 달러를 주지는 않았어요. 서독의 물건을 살 수 있는 쿠폰만 줬어요』


『사회주의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非국민』

─盧武鉉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盧武鉉 정부는 통일정책을 추진하면서 헌법을 지켜야 합니다.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는 통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이러한 헌법의 요구를 무시하는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이 아닙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어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통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헌법을 벗어난 「非국민」이야, 非국민. 그런 사람은 국가의 이름으로 견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非국민」을 견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있는 것입니다만, 예전에 목사님은 보안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 아니었습니까.

『나는 헌법의 기틀이 잡혀 있고, 안보가 탄탄할 때는 보안법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헌법질서와 안보가 흔들릴 때는 보안법이 필요합니다. 다만 남용되지 않게 정권이 도덕성을 가져야겠지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소용돌이는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우리 사회의 취약점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렇게 까뒤집어 진단을 하는 게 좋겠지요. 그래야 처방이 가능할 테니까…』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西獨이 東獨을 도울 때는 반드시 人權문제와 결부시켰어요. 이런 얘기는 다 빼놓고 「西獨이 東獨을 도왔다」는 것만 강조하는 것은 눈 감고 아웅 하는 짓이에요.

「우리가 도와주니까 우리 물건을 사라」,「쌀 10만t을 줄 테니 수용소 하나 없애라, 정치범 100명을 내려보내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수령제일주의에 지식인들이 동조하는 것은 민족적 재앙』

여기서 金鎭洪 목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엔인권위원회의 對北인권결의안 표결 때, 왜 대한민국이 기권을 합니까? 우리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 나라요?

우리가 對北인권결의안에 기권한 것은 북한의 인권유린에 간접적으로 동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몰상식한 상놈의 나라요? 이건 단군할배가 분노할 일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대학교수들이 헛소리하는 것을 보면 나는 정말 열받아요. 대한민국 지식인들, 반성해야 돼. 자기 어머니, 아버지, 동생이 북한에 있어 봐요, 그런 소리 할 수 있는가?

역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오. 민주주의와 인권 때문에 1970~1980년대에 그렇게 고생했는데,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은 중요하고, 북한 동포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단 말이오? 헌법은 남북한 모두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데, 북조선 형제자매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 거요?

朴正熙 독재를 규탄하는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심한 金日成·金正日 독재에 대해서는 왜 침묵합니까? 北核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북한의 인권문제고, 체제문제요. 수령제일주의라니, 그게 무슨 말라빠진 소리요? 수령은 하늘에서 떨어진 거요?

그런 생각하면 안 되지. 거기에 과거에 민주화운동했다는 지식인들이 동조하는 것은 민족적 재난이자, 정신적 황무지에서 생기는 일시적인 질병이에요』●

※ 이 기사는 현재 시중에서 발매되고 있는 <월간조선> 11월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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