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도 못만들던 나라가 세계11위로… 오! 대한민국"

광복 60주년 특별 기획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 이야기’의 마지막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광복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안 민초(民草)들이 겪은, 특별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처절했을 수도 있는 보통 사람들의 체험담도 실어 달라는 독자들의 요구가 많았고 제보도 잇따랐습니다. 지면 사정상 그 요구를 다 반영하지 못하는 점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편집자〉

◇한계주(韓季珠·1931년 경북 청도 출생)

초등학교 때 중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겪었고, 중학 2년에 광복을 맞았다. 일제 말기 학교 건물은 군부대에 징발당하고 수업은 폐지된 지 오래였다. 여학생이던 나도 보리짚 모자에 ‘몸뻬’ 바지, ‘게다’를 끌고 날마다 작업 현장으로 끌려 다녔다. 소나무의 송진을 톱으로 자르고, 농장에서 풀을 뽑고,공장에서 수류탄을 만들었다.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에는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쇠에 녹인 초를 입히는 수류탄 제조작업을 하고 있었다. 정오에 일왕의 중대 방송이 있다고 해서 작업을 미뤄놓고 운동장에 모였다.

12시 정각,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떨린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다음날부터 언제 만들었는지 태극기가 나부끼고, “조선 독립 만세”의 함성이 거리를 메웠다. 무슨 무슨 당과 단체·정당과 사회단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났다.

모두가 ‘조선 독립’을 구호로 삼고 있었다. “조선 독립 만세” “일본제국주의 물러가라”, “우리에게 자유 평등 평화를”.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세우려는 도도한 물결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러나 열다섯 나이에 맞은 광복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좌우 대립에 이어 6·25전쟁으로 온나라가 잿더미가 됐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성냥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해 불을 붙이려면 ‘픽’ 하고 꺼지고 스무 개비, 서른 개비를 버려야 겨우 성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폐허를 딛고 오늘날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오, 대한민국” 소리가 절로 나온다.

◇노영우(盧英愚·1925년 충남 부여 출생)

8·15 당시 난 진해에 있던 일본 해병단의 ‘결사대’였다. 미군 상륙에 대비, 폭탄을 등에 매고 매복하였다가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가 자폭하는 게 임무였다. 1944년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진해에 입대했다가 떠맡은 일이었다.

훈련병 시절 일본인 하사관들은 ‘정신봉’이란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한국인 신병들의 정신을 일본 군인으로 개조해야 한다며 무조건 두들겨댔다. 3개월간의 신병교육 후 중국 상하이를 자원했는데 본대 기간요원으로 남겨졌다.

전쟁 말기 해병단에서 1개 소대를 결사대로 뽑았고, 한국인 병사 8명이 우선적으로 편성됐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우리는 죽을 시간과 장소만 초조히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일왕의 항복 방송이 나왔다.

일본인 장병들은 뿌드득 이를 갈면서 울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우리 한국인 병사 8명은 “이젠 살았다”고 기뻐하면서도 그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무슨 예측 불허의 행동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9월 초 고향인 부여에 돌아왔다.

당시 마을은 치안 부재의 무질서 상태였다. 힘센 자들이 들판에 매인 황소를 멋대로 끌어다 잡아먹기도 했다. 고향에서 친구 5명과 뜻을 모아 후에 제헌의원을 지낸 김철수씨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지방자치대를 만들어 마을의 치안을 잡는 데 힘쓰다가 그해 11월 미 군정에서 배치한 경찰들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1946년 11월 경찰에 입문, 경찰관의 길을 걸었다.

◇채봉기(蔡鳳基·1930년 제주 성산읍 출생

일제 말기는 아이들에게도 힘들었다. 봄이면 고사리, 여름이면 콩과 메밀, 밧줄용으로 모시껍질 말린 것, 가을에는 약초와 피마자 등을 학교에 바쳐야 했다.

1945년 소학교 6학년인 나는 학교에서 방공호를 만드느라 노역에 시달렸다. 운동장 모퉁이에 깊이 1.5m, 길이 5~6m의 참호를 대여섯 개 파서 소나무로 위를 가리고 흙을 덮었다.

광복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8·15 사흘 후였다. 소학교 6학년이던 나는 반 친구 20여명과 운동장 모퉁이에서 놀고 있었다. 담임인 일본인 니시오카 교장 선생님이 오더니 “전쟁이 중단됐다”고 말하지 않는가.

8월 20일쯤 학교 운동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직도 학교에 주둔하던 일본군 한 명이 나를 보더니 “그 기를 찢어버려라”고 고함쳐서 깜짝 놀랐다.

10월부터는 정식으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 ‘네’하고 우리 말로 대답해야 하는데 습관대로 ‘하이’하고 잘못 대답하기도 했다.

체조시간에는 일본어 구령에만 익숙했는데, ‘차렷’ 하고 우리말 구령을 쓰니 처음에는 어색했다. 당시 부른 애국가 가사는 현재와 비슷하지만 곡조는 일제시대 졸업식 노래인 ‘이별의 노래’로 불렀다.

1946년부터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현재의 곡조로 불렀다. 당시 학교에선 애국가와 ‘대한의 노래’ ‘무궁화 강산’ ‘자유의 종소리’ ‘봉선화’ 등을 우리말로 불렀다. 동요로는 ‘반달’ ‘고향생각’ ‘고향의 봄’ 등이 기억난다.

◇임실(林實·1931년 베이징 출생)


8·15를 맞은 곳은 중국 베이징 교외의 일본군 부대였다. 아버지가 일본 건설회사 직원으로 베이징에서 근무해 그곳에서 태어났고, 당시 베이징의 일본중학교 3학년에 다녔다. 그해 5월 ‘학도보국대’가 조직되면서 군대에서 숙식을 하면서 잡무에 종사했다.

14일 저녁 연대본부 부관실에 보관 중이던 문서를 야외 소각장으로 가져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왜 문서를 태울까” 궁금했는데, 다음날 정오 일왕의 항복방송을 들었다. 그날 저녁 부대장인 대좌(대령)는 할복 자살했다.

16일 오후 부대에서 학생들을 집결시켜 내일 귀가하라는 지시를 했다. 당시 시내에 살던 교포들은 첸먼(前門) 밖에 집결했다. 무정부 상태였기 때문에 신변 보호 차원에서 ‘한국인’이라고 쓴 완장을 차고 다녔다.

교민들의 70%는 38선 이북 출신이었다. 생활고와 불안에 시달린 교포 일부는 산하이 관을 거쳐 신의주, 또는 투먼을 통해 귀국길에 올랐다.

먼저 일본인들이 귀국선을 탔고 다음이 우리 교민 차례였다. 교민들은 1주일 정도 톈진 동쪽 탕코우에 수용됐다. 우리 가족은 1946년 5월 15일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콜레라가 유행했기 때문에 입국과 함께 DDT 세례를 받았다.

서울을 거쳐 고향인 개성으로 갔으나 여섯 명 식구가 거처할 집이 없어 개성 남대문 북쪽 갓골의 전재민(戰災民)수용소에서 살았다. 그래도 그해 9월 개성사범학교에 들어가 독립된 조국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박희학(朴熙鶴·1933년 경남 밀양 출생)


1945년 5월 어느 날 수업을 한 시간 빨리 마치더니 전 교생을 강당에 모이게 했다.

일본인 두 명이 (내가 다니던 상동학교) 전시 국민교육 특강을 했다. 강의는 너무 길었다. 쉬는 시간에 변소에 갔는데, 친구들이 뭔가 한 움큼씩 입안에 넣고 까먹는 것을 목격했다.

변소 바로 옆 세면장에 볍씨를 담아놓은 큰 독이 눈에 띄었다. 본능적으로 독 속에 손을 넣고 볍씨를 한 움큼 쥐었다. 다른 친구들도 앞다퉈 볍씨를 꺼냈다. 우리는 강당으로 돌아와 볍씨를 한 알씩 까먹으며 특강을 들었다.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강의는 끝났다. 강당 바닥에는 볍씨 껍질이 가득했다. 사정을 알아차린 선생님은 고함을 질렀고, 우리들은 매를 맞으며 벌을 서야 했다. 그때 볍씨 까먹던 일은 평생 가슴에 못박히다시피 남았다. 평생을 농촌 지도사업에 종사하면서 식량 생산에 뛰어든 것도 그때 기억 때문이다.


목검술 훈련 받는 여고생들 일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학교도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학생들은 군사 연습과 방공호 파기 등에 동원됐다. 사진은 일제 말기 목검술 훈련을 받고 있는 여고생들/'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중

일제 말기 볍씨를 까먹던 우리 세대는 동족 상잔의 6·25전쟁까지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해 오늘날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됐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멸시와 배고픔을 겪어보지 않은 신세대 후배들은 우리들이 온갖 멸시와 궁핍과 싸우며 오늘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기 바란다./정리=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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